선거를 앞둔 시기 모든 언론은 선거에 초점을 맞춘다. 뉴스는 물론이고 프로그램 사이사이 투표를 독려하는 캠페인과 공익광고가 따라붙는다. 6·13지방선거는 달랐다. 심지어 선거를 하루 앞둔 12일에도 거의 모든 언론에서 지방선거를 외면했다. 물론 그 이상의 가치가 있어 보이는 뉴스, 즉 북미정상회담에 ‘올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정치권, 시민의 무관심 속에서 제7회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일테면 밤손님처럼 지나간 선거였다. 그러나 그렇게 치러진 선거라고 해서 당선자의 권위나 권력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이 관심을 가졌든 말든, 정치권에서 심혈을 기울였던 말든, 시민의 관심도가 어떠했느냐와 상관없이 선거는 선거였고, 결과는 예의 당선자와 낙선자로 갈렸다.

후다닥 해치운 선거였지만 거기서 당선된 사람은 실로 어마어마한 권한을 갖게 된다. 선거 때 잠깐 머리를 조아렸을 뿐, 이내 목에 깁스하고 다닐 수도 있고, 온갖 ‘갑질’로 구설수에 오를 수도, 버젓이 관광성 외유잔치를 벌일 수도 있다. 그래서다. 정작 중요한 건 그들을 감시할 시스템의 구축인데, 어찌된 게 이번 선거에선 그런 장치마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서울과 경기도, 인천 등 수도권 광역지자체는 물론이고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지방의회가 더불어민주당의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어찌할 것인가. 단체장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지방의회의 의원들 절대 다수가 단체장과 같은 당으로 구성됐으니 말이다.

문제의 원인은 자명하다. 우선 선거제도의 문제다. 지자체장과 지방의원을 동시에 뽑는 것은 마치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동시에 뽑는 것과 같다. 그리 되면 특정 정당 대통령 후보의 인기도에 따라 덩달아 국회의원 후보의 명암이 갈린다. 그래선 안 되기에 대선과 총선을 분리 실시하는 것이며, 자연스럽게 총선은 중간선거의 의미를 갖는다.

언론과 시민의 무관심도 밤손님 같은 선거에 한 몫을 했다. 대선이나 총선은 미래를 염두에 둔 선거의 성격을 갖는다. 반면 지방선거는 과거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강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택하듯 지난 4년의 시정에 대한 심판으로서 지방선거에 임해야 한다. 그러려면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게 매니페스토 운동이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우리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쥐락펴락하는 교육감 선거까지 함께 치른 것이었다. 각 지역의 교육감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과연 어떤 정책비전을 제시했는가, 당선 후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도대체 그들은 왜 선거를 통해 뽑고 있는 건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는가. 교육감 후보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정책이나 비전은 더욱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김없이 새로운 교육감은 탄생했고, 4년 동안 아이들의 교육의 장을 호령할 것이다.

우리가 만든 현실이고, 현실의 질곡이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이젠 솔직히 지겹다. 말의 주체가 모호하고 말의 대상이 애매하며, 말의 구체성마저 결여됐기 때문이다. 말의 주체가 분명하고, 말의 대상이 명확하며, 말의 구체성이 제시되는 유일한 리트머스가 선거라는 제도다. 더 이상 제도의 허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제도를 바꿀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시민이 답이다. 시민이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제도만 탓하고 있기엔 우리들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시민이 감시하는 체계라야 더욱 빛을 발한다. 시민감시의 근간은 다각적인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와 노력이며 실질적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다시 거버넌스의 구축은 광장문화의 복원, 즉 촛불정신의 발전적 계승이다.



‘너른 마당이란 대문이 열려 있는 마당입니다

대문이 열려 있으면 마당과 골목이 연결됩니다

그만큼 넓어집니다

그러나 열린 마당은

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소통과 만남의 장場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신영복, ‘너른 마당’ 전문.)



마당은 담론의 장이다. 담론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담론의 장은 광장으로 연결된다. 광장은 역사를 바꾼다. 역사의 주체는 시민이다. 마당에 모인 시민들이 담론의 장을 만들어 시민광장을 이룰 때 어설픈 선거제도의 한계는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다. 그게 올바른 민주주의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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