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에 있는 ‘느림’과 ‘탐닉’이라는 말에 독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수년 전, 나는 유학 시절의 고독함을 위로해 주었던 유명 커피숍의 배너 광고를 잊지 못한다. ‘작은 탐닉을 즐기세요.’ 이런 문구였다.

당시 나는 딸 둘과 아내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가장이었고, 나이 서른이 넘어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배움에 대한 열심은 누구보다 앞섰던 터라 열심히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나는 그 광고카피의 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커피숍과 함께 있는 대형 서점에 뛰어들어가 사전을 뒤적였고, 결국 그 뜻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라고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밤을 새우며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무장 해제를 하고 잠깐 쉬라는 유혹이었다. 정말 바쁘게 살 때 가뭄의 단비처럼 내게 찾아와 준 광고카피를 만난 이후로 나는 성실하게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

바쁜 생활이 일상인 사람들에게는 잠깐의 쉼도 사치일 수 있다. 밤낮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어려운 취업 관문을 뚫기 위해 무더위에 대학 도서관을 내 집 드나드는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작은 탐닉’이란 어림도 없는 사치일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일상에서 물러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 보다 오히려 익숙해져 버린 삶의 양식에 내몰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이미 구조화된 어떤 특정의 사회적 통념이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최장시간의 근로시간을 가졌고, 그에 반해 OECD 국가 중에 가장 최저에 가까운 생산성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는 이미 국민 상식이 됐다.

이미 많이 일하고, 바쁘게만 산다고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우리 사회가 가장 선호하는 구호가 ‘혁신(革新)’이다.

그런데 혁신이라는 말조차도 바쁘게 살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혁신이라는 말은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다. 가끔 공항 면세점이나 유명 백화점에 나가면 우리는 혁신의 부산물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누렇고 냄새나는 소가죽이 수천만 원, 수백만 원 하는 핸드백이나 구두로 변신을 하는 것일까? 혁신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절충성의 시대’,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다. 이 시대는 ‘일리(一理)’나 ‘합리성(合理性)’이 무조건 수용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티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탈피하려는 시대성이며, 표류, 또는 탈주로서 시대성을 상징한다.

반면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는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합리성과 객관성이 주목받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자랑은 ‘직선’에 대한 과도한 신념이었다.

변화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지만, 변화해야만 좋은 것일 때가 있다. 적어도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창조적이고 신선한 물러남을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왜 우리는 매일 바쁘게만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바쁘면 항상 성과가 있다는 것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살아가는가?

천천히 가자. 쉬엄쉬엄 살자. 삶을 균형 있게 다뤄보자. 카메라용 삼각대가 왜 세 개의 다리를 가졌는지 생각하자.

일과 가정, 그리고 적당한 쉼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충대충 살면서 쉼과 느림을 추구하자는 말이 아니다. 느림을 진정으로 탐닉한다는 것은 성실과 정직, 그리고 공헌이라는 3요소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내가 쉴 수 있는 여유와 형편이 담보된다. 진정한 느림은 무책임과 방관의 가치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시 물러남을 의미한다. 더 멀리, 더 빨리, 그리고 더 안정적인 향상을 위한 작은 탐닉을 의미한다. 열심히 산 당신, 이제는 조금 천천히 가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오죽하면 국가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도록 강제하고 있을까.


차종관 목사 세움교회 성결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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