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가 땅에 닿도록 납작 엎드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기대 왕의 행차시 백성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무려 약 4천여 번이나 백성들에게 길이 막힌 왕이 있었다면 믿겠는가. 주인공은 바로 우리 역사상 몇 안 되는 대왕의 칭호를 갖고 있는 ‘정조 대왕’이다. 정조는 영조 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출생뿐 아니라, 수원화성, 탕평책 등 조선시대의 왕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이야기꺼리를 가진 왕이기도 하다. 그러한 정조가 백성들에게 길이 막혔다는 건 무슨 얘기인가. 그것은 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격쟁(擊錚)제도 때문이다. 정조 시대 에 가장 활성화 됐으며 정조는 재임 24년간 66회의 원행을 통해 약 4천여건의 상언과 격쟁을 받았다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효심이 강한 정조는 화성의 사조세자의 융릉에 자주 능행했다. 하지만 정조의 능행에는 단지 효심뿐 아니라, 수원을 신도시로 발전시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으며, 능행을 백성과 소통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었다. 실제 정조는 능행에 앞서 미리 한글로 된 방을 붙여 왕의 행차를 널리 알렸으며, 왕의 행차를 백성들이 구경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그러던 1791년 정월 18일,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재미있고 놀라운 이야기가 일어났다. 융릉 능행길이던 정조의 어가를 세운 이가 있었으니, 흑산도의 어민 김이수 이었다. 그가 ‘꽹과리’를 울린 이유는 흑산도 주민들에게 징수된 닥나무 세금을 거둬 달라는 청 때문이었다. 김이수는 관리도 아니요, 지식인도 아닌 흑산도의 평범한 어민 이었다. 그는 이미 흑산도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는 닥나무 종이 조공 때문에 주민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바로 잡고자 나주목이나 그 상급기관인 전라감영에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최후에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격쟁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5월22일, 정조는 흑산도 조세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를 받고 폐지 결정을 내린다. 국가 최고 권력자가 자신의 길을 막아서고 올린 시골 어부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오늘날 정조의 도시인 수원에서도 격쟁이 울리고 있다. 경기지방경찰청이 시행하고 있는 소통마당 ‘밴드(band)’ 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뽑는 소통의 가장 큰 전재법칙인 ‘경청’을 위해 경찰이 ‘밴드’라는 능행을 시작하고 ‘꽹과리’를 길어 걸어 둔 것이다. 도민과 소통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랄까 여기저기서 꽹과리를 울리며 현대판 김이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통 및 안전시설 등 생활 민원부터, 수원의 유천파출소에는 관내 거주하는 외국인이 밴드를 통해 문턱이 낮아진 파출소를 찾아와 최근 일어난 외국인 범죄에 의한 인식으로 속상한 마음을 상담하고자 찾아와 토로를 하고 외국인 순찰활동 참여를 약속하기도 했다. 정조의 격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백성의 이야기를 듣고 그 어려움을 풀어주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민원해결 이라는 결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지방청도 ‘밴드’라는 소통의 방식이 언젠가는 다른 방식으로 변할지라도 도민의 민원을 경청하고 해결하려는 의지를 이어나가야 할 것이며, 그 소통과 변화를 통해 더욱 안전한 치안을 이뤄야 할 것이다.

수원서부경찰서 경무계 조성신 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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