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20) 초상화로 남은 고려인
③ 강민첨(姜民瞻) 초상

   
 

‘一毫不似 便是他人(터럭 한 올이라도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

                                                       -정이(程頤)(1033-1107)

#초상 왕국인 우리나라-예술적 성취와 깊은 감동

‘초상화’는 근대이후 사용되는 단어이다. 옛 문헌에는 진(眞), 영(影), 상(像), 사진(寫眞), 화상(畵像), 영정(影幀) 등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각기 본질과 형상화 그리고 닮게 본뜬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초상화 연구에 있어 최고의 권위자인 조선미(趙善美) 교수는 ‘대상인물이 지닌 불변하는 본질을 본떠서 화면 위에 형상화해낸 회화’로 정의한다. 짙은 화장을 한 경극(京劇) 배우 같은 과장된 중국초상이나 인물 배경에 장식성이 강한 일본초상과는 달리 학덕이나 인품 등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잘 표출한 우리 초상은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의 역사를 소재 측면에서 살피면 동물·인물·산수화 순으로 발전한다. 들소·말·멧돼지·암사슴 등이 그려진 19세기에 존재가 알려진 스페인의 알타미라에 이어 1940년 발견된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벽화, 1971년 여름 발견된 우리나라 회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채색의 사용 없이 바위에 새긴 반구대암각화 모두는 동물들이다. 순수미술에 앞서 선사미술의 특징인 의식(儀式)과 주술(呪術)을 반영하니 이들 모두는 수렵에의 성공과 희생동물에 대한 위령(慰靈)을 위해 그린 것들로 봄이 일반적이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며 그 규모가 점차 커져 국가를 세운다. 이 과정에 민족을 이끈 위인이나 성군(聖君)에 대한 존경과 기억, 반대로 적이나 포악한 군주에 대한 경계 등 포폄(褒貶)의 차원에서도 그려지게 되며 인물화는 발전한다. 오늘날도 우리 역사상 업적이 두드러진 인물에 대한 조각이나 그림은 지속해서 이어진다. 우리나라 옛 초상화는 한자문화권으로 유교와 불교 및 한자를 공유한 동아시아 삼국의 차원을 넘어 지구촌 전체에 내놓아도 작품의 수준과 완성도에서 뒤지지 않는다. 단연 돋보이며 화풍상 독자성과 특징이 두드러진다.

선사시대부터 얼굴이나 인물상은 제작되었으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역사는 4세기, 고구려 고분벽화까지 올라간다. 안악 3호분·덕흥리고분·쌍영총·매산리 사신총 등 주인공의 초상을 살필 수 있다. 고구려를 제외한 백제나 신라의 초상은 전하는 것이 드무나 중국 그림에 사신으로 간 삼국시대 각기 다른 복색의 인물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는 고려불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인물화가 크게 발달했다. 진전제도의 발전으로 초상화가 빈번하게 그렸다. 하지만 오늘날 전해진 고려시대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시대 옮겨 그린 것들이다.

   
최치원(좌)·강현 초상 부분-강민첨 초상에서 볼 수 있는 고려시대 명현 초상의 특성인 특징을 요약한 간략하게 붉은선으로 그린 얼굴·큰 귀와 작은 입 그리고 옆으로 긴 눈매는 1793년 화승이 '최치원상'과도 연결되며, 큰 귀는 그의 후손 강현 초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고려 명현 초상은 조선시대 일반 형식인 좌안과 달리 오른쪽 얼굴이 부각된 우안인 전ㅁ도 살펴볼 수 있다.

#고려 초상의 현황-대체로 조선시대 옮긴 초상이 전함

그림에 명성을 얻은 5명의 고려시대 임금 중 공민왕(恭愍王·1330-1374)은 유일하게 유작이 전한다. 산수 외에 양과 수렵도, 나아가 초상에도 능해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여러 문신 등 문헌에 그가 그린 10명의 초상화 목록도 나타나 있다. 조선시대 초상은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임금 초상은 어용(御容)·성용(聖容)·어진(御眞)으로 불린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대 공을 세운 인물인 공신상(功臣像)·장수에 고귀한과 덕을 겸비한 이들을 기념하는 기로도상(耆老圖像)·일반사대부상·여인상·승상(僧像) 등이다.

고려시대는 영전제도의 발전으로 국가기관인 경령전(景靈殿)을 비롯해 사찰 안 영전(影殿)에 왕과 왕비를 봉안했고, 공신초상도 그려졌으며 조선과 달리 여성초상과 선종(禪宗)의 융성과 더불어 스님의 초상들도 활발하게 제작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전해오는 고려시대 인물초상은 드물며 대부분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이들 또한 후대 다시 그려진 것들이다. 하지만 본 모습에 충실하게 그대로 옮기는 초상화의 특성상 고려시대 양식을 담고 있어 조선과는 차이를 보인다.

화면 내 제작연대가 1319년 명기된 국보 제110호 ‘이제현(李齊賢·1287-1367) 상(像)’은 고려시대 그려진 것이나 이를 그린 화가는 고려가 아닌 원나라 진감여(陳鑑如)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봉안된 국보 제111호 ‘안양(安養·1243-1306) 상(像)’은 이불해(李不害·16세기), 한산이씨 대종중 소장 보물 제1215호 ‘이색(李穡·1328-1396) 상(像)’은 1654년 허의(許懿·1601-?)와 김명국(金明國·1600-1663이후), 공민왕의 그린 것으로 전하는 보물 제1097호 공민왕의 장인 ‘염제신(廉悌臣·1304-1382) 상(像)’도 조선후기 옮겨 그린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여기서 살피는 보물 제588호 ‘강민첨(姜民瞻像·963-1021)’ 초상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 고려시대 명현 초상은 조선시대 일반형식인 좌안(左顔)과 달리 오른쪽 얼굴이 부각된 우안(右顔)인 점에서 구별된다.

“경술년 오랑캐 풍진이 있어 한강에 이르기까지 전란이 깊이 들어와

당시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가 될 뻔 했네.

庚戌年中有虜塵 干戈沈入漢江濱 當時不用姜公策 擧國皆爲左衽人”

-고려 제8대 현종(顯宗·992-1031)이 1018년 강감찬에게 내린 의 찬시(讚詩)

#이민족 외침에 나라를 지킨 강민첨-문관으로 외침 격파

강감찬(姜邯贊·948-1031)은 1010년과 1018년 양차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다. 특히 1018년 흥화진(興化鎭)에서 10만 거란 군사들을 수장시키고 자주와 신계에 이어 구주에서 섬멸한 구주대첩(龜州大捷)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선시대에도 외침이 있을 때 의병(義兵)으로 선비들이 나섰으니 고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1018년 강감찬 아래서 혁혁한 공을 쌓은 청사에 향기로운 이름을 남긴 강민첨(姜民瞻·963-1021)은 문관(文官)이었으나 강한 의지와 기개로 이민족 침입 때 연이은 전공을 세우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강민첨은 1010년 현종 1년 거란침입 시 조원과 함께 흩어진 9일간 성을 지켜 현종을 남쪽으로 무사히 몽진하게 했다. 이 공으로 도관시(都官試) 원외랑(정6품)에 제수되었고 허리에 차는 비단으로 된 장신구 비어대(斐魚袋)를 하사받았다. 1012년 5월 현종 3년에 안찰사가 되어 경북 영일 등지에 쳐들어온 여진을 문연·이인택·조자기 등과 함께 표면에 날카로운 못을 꽂은 과선(戈船)으로 격퇴하였다.

1018년(현종 9) 12월 현종 9년 거란 소손녕(蕭遜寧)이 10만을 군사를 이끌고 재 침입하자, 상원수 강감찬 아래 부원수가 되어 이들을 대파했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1만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낸 수공으로 혼란에 빠진 거란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와 신계에서 협공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구주에서 적을 섬멸해 침략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1019년 은청흥록대부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상주국(上柱國)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 삼백호에 봉해지고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그해 12월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되었으며, 1020년 3월 병부상서 겸 태자태사, 현릉 개장의 공으로 금자흥록대부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021년 11월12일에 타계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아들 단에게도 녹자(祿資)를 하사했다. 현종은 그를 국장으로 충남 예산에 예장했고 정종은 전공이 큰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한벽상공신으로 공신각에 초상을 안치했다.

#은열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초상-조선후기에 고려 양식이 담김

강민첨은 963년(광종 14) 진주에서 원윤 벼슬을 역임한 아버지 강보능과 어머니 거창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는 경남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15세까지는 향교에서 학문을 닦으며 관직에 나가지 전엔 학문연마와 후배 양성에 전념했다. 경남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된 옥종면 두양리에 있는 수령 900년 높이 27m인 두양리은행나무(斗陽里檭杏)는 강민첨이 선조의 사적지인 이곳에 왔을 때 심은 은행나무라고 전한다.

43세인 1005년(목종 4)년 비로소 문과에 급제하여 장사랑·문림랑·도교령·안변도호부 장서기(掌書記)·국자주부동정(國子主簿同正)·도호사록참군(都護司錄參軍)·상서직장동정(尙書直長同正) 등을 역임했다. 사후에 그에게 태자태사 문하시랑에 추증하고 은렬(殷烈)이란 시호를 내려져서 은렬공파(殷烈公派)가 탄생되었다. 1046년(정종 12)에 공신도형(功臣圖形)에 올려 삼한벽상공신이 되었다. 오늘날 전하는 강민첨초상은 아마도 이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 상단에 있는 제기(題記)를 통해 1788년 진주병사(晉州兵使)로 재직했던 이연필(李延弼)이 우방사(牛芳寺) 소장 초상을 범본(範本)으로 화사(畵師) 박춘빈이 옮겨 그렸음이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진주목’에는 원래 강민첨의 초상은 진주 우산에 소재한 모방사(茅房寺)에 있다고 명기되어 있으니, 이 초상을 옮겨 그리기 전에 우방사로 옮겨온 것으로 사료된다.

이 초상은 회양책사(淮陽冊舍)에 보관되어 오던 것이 문중에 귀속하여 1975년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중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시대 초상화특별전’(1979.10.25-11.25)에 후손인 보물 제589호 강현(姜鋧)·1650-1733), 보물 제590호로 지정된 2점인 1782년에 그린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자화상과 이명기가 그린 강세황 71세상 등 진주강씨 명문가 보물 4점이 한 자리에서 전시되었다.

초상은 ‘공민왕과 노국대장상’에서와 같은 복두(幞頭)에 정장하고 홀(笏)을 쥐고 앉은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의 반신상으로서 고려시대 공신상 형식을 짐작하게 한다. 뒤로 보이는 의자의 호피는 옮겨 그린 시기인 18세기 후반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특징을 요약한 간략하게 붉은 선으로 그린 얼굴은 큰 귀와 작은 입 그리고 옆으로 긴 눈매는 1793년 화승이 ‘최치원상(崔致遠像)’과도 연결되며 승상이나 불화 등 도석인물화와 통한다. 큰 귀는 그의 후손 강현 초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매주름을 포함해 전체적으로 도식화 된 면이 감지된다. 세부 묘사가 많이 생략되었고 채색은 옅은 담채위주이다. 녹색 옷에는 박락이 있으며 붉은 선으로 표현한 무늬도 살필 수 있다. 그의 탄생지에 세워진 진주 은렬사에는 이 초상을 바탕으로 뒤에 제작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3호인 전신의자상(全身椅子像)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원복(문화재위원, 전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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