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상태였던 미국과 북한 사이에 협상이 재개된다고 하니 기대가 크다.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 역할로 북·미의 분위기를 바꾼 것은 사실이고, 그걸 평가하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향후 협상에서 북한 비핵화의 실질적 성과를 일궈내야 하기 때문이다. 6·12 북·미 정상회담이 ‘속 빈 강정’으로 끝났기에 알맹이 있는 협상은 더욱 긴요하다.

문 대통령이 뉴욕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하고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가운데 미국에선 북핵에 대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 중에서 협상의 정곡을 짚은 것은 “물건을 보지도 않고 사는 일(buy a pig in a poke)은 없을 것”이란 얘기였다. 충동구매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실무 협상을 책임질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었기에 반가웠다. 주머니(poke) 속에 고양이를 넣고서 돼지(pig)라고 속여 판 옛 영국의 못된 상인에게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였기에 미더워 보였다. 이달 중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고 리용호(외무상)·김영철(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등과 협상할 걸로 알려진 폼페이오가 이런 자세를 유지한다면 북한이 꼼수를 쓰더라도 미국이 쉽게 속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미국은 물건을 따져 보겠다고 하는 데 한국이 덥석 충동구매 유혹에 빠진다면 미국의 김은 새고, 협상력은 떨어질 터여서다. 이건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그간 언행이 낳은 불안감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유엔총회 연설에서도 한국전의 조속한 종전(終戰)선언을 강조했다. “(대북 협상에서) 먼저 필요한 것이 종전선언이다”(9월 25일 미국 폭스뉴스와의 인터뷰)라는 입장을 줄기차게 이야기한 것이다. 북한은 핵무기, 핵시설, 핵물질을 성실하게 신고하고 검증과 사찰을 받겠다는 뜻을 공식적·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북핵 신고와 검증’보다 종전선언이 급한 것인 양 말하고 있다. 북핵 신고는 북한 비핵화의 입구에 해당하는 본질적인 문제다. 신고의 검증은 비핵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사안이다. 이 두 가지가 확실하게 해결돼야 핵 폐기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 그리고 북핵의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폐기가 이뤄져야 진정한 평화가 담보되고, 종전다운 종전이 가능하다. 비핵화 입구에도 진입하지 못한 현 상태에서 “평화가 왔다”고 흥분하는 것은 우물물을 보고 숭늉이라고 하는 격이다. 너무 성급하고 어설프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종전 선언은 정치적 선언이므로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며 ”미국은 손해 볼 일이 전혀 없다”고 했다. 미국에 어서 종전선언을 하자고 채근하는 듯한 문 대통령의 이 말대로 종전선언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일까? 종전선언에 목을 매는 북한이 취소할리는 없다. 종전선언을 하고 나면 그걸 유엔사령부 해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의 근거로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북한이기에 그렇다. 결국 취소는 우리나 미국의 몫일 텐데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이유로 그걸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하려 한다면 ‘상황과 이유’를 둘러싸고 우리 내부와 한·미 사이에 분열과 갈등이 발생할 거고, 북한은 그걸 이용할 게 틀림없다. 문 대통령이 이런 현실을 모르고 ‘우선 해 보고 안 되면 취소‘라고 했다면 순진한 것이고, 알고서도 그랬다면 유엔무대에서 지적받은 것처럼 북한을 대변하는 것이다. 북핵 신고·검증과 관련해 북이 무슨 물건을 내놓을지 모르는데 종전선언부터 하자는 것은 물건의 하자 여부도 따져보지 않고 무턱대고 사겠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이상일 전 국회의원(단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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