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4년(세종 26) 2월 20일,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앞에서 세종은 분노하고 있었다. 평소 차분한 세종이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집현전 학사들과 편하게 훈민정음에 대해 토론을 하고자 했는데, 이들은 오히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자신의 면전에서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은 세종이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10여년 이상을 고민하고 연구해 만든 훈민정음의 반포에 대해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를 위반하는 행위라고 압박했다.

“우리 조선은 조종(祖宗) 때부터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했는데,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다’라고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했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최만리는 만약 세종이 만든 문자가 명나라에 알려지게 된다면 양국의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고 거의 협박수준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조선 건국의 이념이 사대교린(事大交隣), 즉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와 사귄다는 것이다 보니 조선 사대부들의 사대주의는 극에 달해 있었다. 조선보다 발달된 중국의 문화를 선호하는 것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조선의 모든 것이 중국보다 하찮은 것이고, 조선은 무조건 중국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조선 국정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을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고, 토론 두 달 전인 1443년(세종 25) 12월 30일에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나서야 학사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그러자 훈민정음을 반대하는신하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또한 만약 백성들이 언문만 사용하게 된다면 성현의 문자를 익히지 못해 아름답게 교화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즉 훈민정음만을 사용한다면 사서삼경 등의 한문 경전을 읽지 못해 풍속이 문란해질 것이라는, 참으로 어이 없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세종은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며 강하게 신하들을 압박했다.

신하들에게 논리적으로 밀리면 문자를 반포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세종은 안하무인 식으로 대드는 학사들에 대한 분노를 낮추고 차분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문만 익히다 보면 교화가 안 된다는 논리 대신 오히려 정음 창제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익히기 어려운 한문보다 익히기 쉬운 훈민정음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들이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이러한 세종의 논리에 대해 당대 최고의 지식이란 집현전 학사들은 끝내 반박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이후에도 최만리 등 집현전 학사들과 여러 차례에 걸쳐 열띤 토론을 지속했고 결국 이들에게 승리했다. 중국에 사대하는 논리보다 백성을 위한 마음과 실천이 훨씬 더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세종은 1446년(세종 28) 9월 29일(양력 10월 9일)에 훈민정음을 반포했으며, 이로써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를 갖는 민족이 됐다.

10년 전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 된 뒤 국보의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환기되자 상당수 국민들은 ‘한글’을 국보 1호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 덕분에 2013년부터 한글날은 다시 법정 공휴일로 지정돼 그 지위를 회복하게 됐다. 지난 9일 ‘572돌 한글날’을 맞아 각 방송사는 물론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영어 로고 대신 한글을 사용하고 아름다운 한글폰트를 선보였다. 참으로 좋아 보였다. 하지만 만 하루가 지나자 원래의 영어로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단 하루의 이벤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영향력 있는 웹사이트와 매스미디어에서 한글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운동을 펼쳤으면 한다.

김준혁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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