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이 경기도 지역으로 확산되던 3월 27일 서면 소하리 거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만세를 불렀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돼 주재소에 구금됐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광명문화원이 3·1운동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는 모습. 사진=양철원 광명시 학예연구사

 

외세에 저항하던 광명시의 사람들

광명시는 서울에 인접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정조 임금의 능행로인 지금의 1번 국도 및 구한말에 설치된 경인철도와 경부철도가 가까이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으로 서울 등지에서 벌어지는 주변의 흐름에 민감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시흥군에 속하다가 1914년 일제강점기에 시흥군 서면으로 편제되었다. 당시 서면 지역은 지금의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소하동, 학온동 지역과 안양 박달동을 포함한 지역이었으며 면사무소는 소하리에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18년에 인천 안산 등지에서 오는 길목인 서면 노온사리에 영등포 경찰서 서면 주재소를 설치하여 주민 감시 통제를 강화하였다.

시흥군 서면의 중심지인 소하리(지금의 소하동)에는 서울의 고등 교육기관인 배재고보 등지에 다니던 청년들이 있었고 비정규 사립 교육기관인 운양의숙이 오래전부터 존재하는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1896년과 1904년 2회에 걸친 시흥 농민봉기가 서면 중심의 사람들로 촉발되었으며 1만여 명의 봉기 참가자들이 모여 군중집회를 연 곳도 서면에서 가까운 한천교(지금의 안양천) 부근이었다. 당시의 봉기는 조선 정부의 봉건성에 대한 저항과 일제의 경부철도 건설 역부 과다 배정에 반대하여 들고일어난 사건이었다. 봉기의 결과 조선인 군수 포함 일본인 2명이 죽고 군민들도 여러 명이 죽고 다치는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동대문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들어와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봉기의 주동자 김원록은 반란죄로 사형이, 광명시 학온동 집강 성우경과 하주명에게는 각각 무기징역과 15년형이 선고되었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인물들 중 반 이상이 광명 출신으로 철산리(현 광명시 철산동) 양인 최영선. 민신규. 유학 한성회, 집강 유학 이용년, 집강 유학 서상이, 일직리(광명시 일직동) 유학 이범학, 자경리(광명시 일직동) 집강 이연회, 소하리(광명시 소하동) 소임 최덕순, 안현리(광명시 하안동) 부유사 강선교, 율일리(광명시 하안동) 집강 유학 김교성, 광명리 유학 한긍회, 유학 신치옥, 유학 한백규, 유학 권경천, 광명리 소임 박점석 등이 고초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지역의 사회경제적 여건은 1910년 안산 시흥 과천을 포함한 시흥지역의 조선인 호구 수는 1만1천718호였으나 1918년에는 1만1천197호로 521호나 줄어들었다. 반면에 일본인 호구 수는 1910년 325호였으나 1918년 518호로 늘어났다. 이는 일본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함에 따라 한국인 농민의 분해과정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일본인 유입 인구의 증가는 지역 농민들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여 농민들의 경제적 몰락 및 이농을 불러일으킨걸로 보인다.

살펴본 바와 같이 외세의 거세지는 식민지 수탈 환경에 저항하는 전통적인 집단 의지와 높은 교육열로 각성된 주민들의 존재가 광명지역에서 3 1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광명지역 3·1운동의 현장이었던 옛 주재소 터에 현재는 온신초등학교가 들어서있는 모습. 

광명지역의 3.1운동의 전개 과정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이 경기도 지역으로 확산되던 3월 27일 서면 소하리 거주 이정석은 노온사리 주재소 부근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선동하고 만세를 불렀다가 28일 아침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법 위반죄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아버지 이종원은 마침 서울 지역의 만세운동으로 학교가 휴교되어 집에 내려와 있던 배재고보생 최호천에게 이정석을 구출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최호천은 같은 마을의 동문 배재고보생 윤의병에게도 주재소를 습격하자고 제안하여 주민을 모아 오게 하였다. 각자 모아온주민 70여 명이 면사무소 부근에서 모여 이정석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인근 가리대 마을에서 100여 명이 합세하여 200여 명의 인원이 되었다. 시위대는 최호천과 윤의병이 이끌고 이종원과 같은 마을의 김거봉, 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5명이 앞장서서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로 향하는 도중에 최호천은 시위 군중에게 곤봉이나 돌로 무장할 것을 권하고 경찰이 발포하거나 폭행을 하더라도 퇴각하지 말고. 휴대한 돌이나 곤봉으로 대항할 것을 일러두었다. 200여 명의 시위대는 밤 10시경 구름산을 넘어 주재소에 다다라 주재소를 포위하고 함성을 질렀다. 시위대는 이어 몽둥이로 주재소 앞 게시판을 때려 부수고, 주재소 숙직실의 뒷면 벽에 약 1치 반쯤의 구멍을 뚫고 침실 문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시위대가 닥치자 주재소 안에 있던 경찰은 처음에는 불을 끄고 아무도 없는 듯이 위장하였으나 곧 발각이 되었다. 최호천과 윤의병은 경찰과 담판을 하며 이정석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이미 영등포 본서에 넘어갔음을 알고 다음날 본서에 가는 일본인 경찰에게 이정석의 신병 취하를 약속받았다. 이에 시위대는 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후 경찰 병력을 파견하여 최호천, 윤의병, 이종원, 유지호, 최정성, 김인한, 최주환 등을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했다.

결국 최호천 징역 2년, 윤의병 징역 2년, 최주환, 유지호, 최정성은 징역 1년 6개월, 김거봉 징역 6월, 이종원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광명시의 정체성 확보를 위해 설치된 3.1운동 표석비의 뒷면.

 

광명지역 3 1운동의 특징


앞서 살펴 본 광명지역의 3 1운동은 참여 민의 성격면에서 학생 출신의 지식인과 청년 농민이 결합한 점, 폭력 시위를 준비한 점, 자발적인 주민들의 참여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최호천은 짧은 준비 기간에도 야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돌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대응하라는 지침을 참가자들에게 교육시켰다. 무장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야간에 시위한다면, 경찰의 폭력에 시위대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는데도 그는 야간의 시위를 돌과 곤봉으로 시위대를 무장시킨 채 감행하였다. 경찰이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아 더 큰 충돌은 없었지만, 시위대는 주재소의 게시판을 부수고 벽을 헐어 버리는 무력을 행사하였다. 시위대의 위협에 놀란 경찰이 발포로 대응하리라 예상한 최호천이, 시위대를 돌과 곤봉으로 무장시키고, 발포할 경우 퇴각하지 말고 대응하라고 선동한 사실은, 지식층인 학생의 의식과 3 1운동이 폭력화하여 가는 일반적인 과정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참가는 연행자의 진술조서에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인치된 이정석을 찾아오러 간다는 말을 듣고 주막에 가서 보니 다수의 참가자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고 진술한 내용이나, 오후 7시경에 이미 많은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보면 조직적이면서도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엇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도부의 나이가 최호천, 윤의병, 김거봉, 최정성은 20세 전후, 유지호는 28세, 최주환은 38세인 걸로 보아 마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젊은 층이 선두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3.1운동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매우 자발적이면서도 동(洞) 리(里) 단위의 집단 시위 참가라든지 청년들의 적극적인 참여 모습과도 비슷하다.

비록 광명지역의 3.1운동은 일제 경찰의 속임수로 7명이 구속된는것으로 종결되었지만 그 씨앗은 남아 3.1운동의 주동자인 윤의병을 비롯한 이순구·이병대·이범규 등 여러 청년들이 참가한 소하리 노동야학의 개설로 이어졌다. 1927년 11월에 설립된 야학은 한글 교육 등을 하였다. 소하리 야학은 중간에 여러 사정으로 중지되기도 했으나 1932년까지 지속되어 큰 성과를 이루었다. 1932년 8월 23일과 9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5세 미만의 아동들도 주경야독으로 야학에 참여하여 절반 정도가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으며, 많을 때는 남자 211명, 여자 18명이나 되는 인원이 야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광명 지역 3·1운동 주역들은 사회 계몽운동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광명지역 3 1운동 기념 현황

잊혀가던 광명지역 3.1운동은 2012년 노온사동 주민의 제안으로 운동의 현장이었던 옛 주재소 터(현 온신 초등학교)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다시 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로 광명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기념식을 추진하여 국권을 뺏기고 고통받았던 동포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광명 지역민들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또한 10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다가올 통일의 시대를 대비하여 3.1정신을 어떻게 오늘에 구현할지를 생각해보는 시 차원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양철원 광명시 학예연구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