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티셔츠’ 여파로 방탄소년단(BTS)의 일본 방송 출연이 모두 취소됐다. 위안부 문제, 욱일기 게양 문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이어 티셔츠 한 장에 양국관계가 또다시 먹구름에 휘말리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에 있다.

방탄소년단의 지민이 입었던 티셔츠는 작년 월드투어에서도 입었던 옷이다. 지금 일본 우익의 ‘반한, 혐한’을 부추기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방송을 취소할 만큼 심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번 사태로 외신들은 그동안 역사 교과서 왜곡으로 몰랐던 일본 젊은이들이 과거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다고 보도했다.

양국관계는 누구의 잘못인가는 나중 문제이고 우선 감정이 앞선다. 그러다 보니 항상 논리나 현상보다 지난날 쌓인 역사적 원한이 모든 일을 압도하게 된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540년 전 조선의 신숙주는 성종에게 일본과 잘 지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신숙주는 16차례 가량 일본과 명나라 등을 오가며 외교와 전쟁의 임무를 수행했다. 외교의 요체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있지 않고 내수(內修)에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에나 이웃 나라의 존재는 소중하다.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일본은 강대국이다. 우리가 넘어야 하나 넘기가 쉽지 않은 나라다. 잘 지내야 하나 참 힘든 나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라는 치욕의 역사를 가진 우리로서는 일본에 대한 적의와 멸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일본에 대한 평가와 진단은 차고 넘친다. 최근 일본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인정하긴 싫지만 일본과의 격차가 따라가기 힘든 상황에 와 있음을 느낀다.

여기서 일본 국적 노벨상 수상자가 24명이나 되고, 국내총생산 규모(4조 9천억 달러)가 우리와 독일을 합친 것과 같다. 우리보다 훨씬 강대국이다.

국가의 융성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사회적 활력’이다. 도쿄 중심가는 일본 내국인들의 발길이 엄청나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작년 일본 방문 관광객이 무려 2천869만 명으로 우리의 2배가 넘는다.

미술관, 박물관의 특별 전시회를 가보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로 유명한 베르메르 특별전이 우에노의 모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 35점 밖에 없다는 이 화가의 전시회에도 입장료가 2만 7천원인 데도 관람객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노인들이 무료로 전철타고 온양온천까지 가는 것이 선진국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미술관도 가고 박물관도 갈 수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부러운 마음에 호텔에 와 TV를 켜니 JR(일본철도) 회장의 인터뷰가 나온다. 말단직원부터 시작해 회장까지 오른 사람이다.

숱한 지진에도 불구하고 50년이 넘도록 사고가 일어나지 않은 신칸센의 비결을 “안전이란 지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것이 감동이다. 낙하산으로 내려와 마치 해당 업무의 달인처럼 행세하는 우리 공기업 사장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겠지만 거기에서 사회적 신뢰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근대사에서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봤던 중국의 시진핑이 6년 만에 아베를 공식초청하여 환대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며 국제정치는 이념도, 원한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자국의 실리만이 전부다.

한·일 양국은 그 근저에 깔려있는 문화와 가치관이 너무 차이가 나서 냉정한 진단과 이성적 대처가 요구된다. 지금은 서로의 감정이 격화되어 해결이 요원한 것처럼 보이나 역설적으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줄 나라가 옆에 있다는 것은 행운일 수도 있다.

왜구,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등의 역사에서 보듯 신숙주의 말대로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요즘 우리의 상황을 신숙주에게 자문하면 “일본을 알고 중국을 제어하고 미국에겐 이득을 취하라”고 하지 않을까.

이인재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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