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몸이 아플 때도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나는 천생 내 어머니의 자식이다. 내 몸과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다. 몸의 고향은 몰라도 마음의 고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은 또한 어머니의 계절이다. 깊은 가을, 어머니 생각에 몸서리치며 몸보다 마음이 먼저 여주 남한강변을 찾는다. 작년 가을 어머니를 이곳에 모셨다. 바람 한 점, 구름 한 점 없는 맑디맑은 날이었다. 한줌 가루로 남은 어머니는 한없이 가벼우셨다. 강물에 파란 한번 일으키지 않은 채 슬며시 스며드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강이 되셨다. 여강은 내 어머니의 강이다. 여강은 내 어머니다.

살아생전 야윌 대로 야윈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워서 큰맘 먹고 한 번 업어드렸는데 어머니 몸이 어찌나 가볍더니 눈물이 핑 돌아서 한 발 짝도 떼지 못했다. 이내 내려놓고 맛난 것 드시러가자 말씀드렸더니 어머니 방긋 웃으시며 이러셨다. “그럴 돈으로 애들이나 맛난 것 맥여라.”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의 어머니> 전문.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건 화려한 색 때문이 아니다. 고결한 단풍의 정신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한다. 단풍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줄기에게 내어주고 잠시 활활 불타오르다 낙엽으로 떨어져 거름이 된다. 단풍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오로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어준 뒤 한없이 가벼운 몸으로 땅으로 돌아간다.

새의 알은 자연이 빚어낸 걸작 가운데 하나다. 알껍데기의 얼개는 정교하다. 알껍데기는 삼각형의 금속성 결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정들의 뾰족한 끝은 알의 중심을 겨눈다.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으면 결정들이 서로 끼이고 죄이면서 알껍데기의 저항력을 키운다. 성당의 둥근 천장이나 입구의 아치처럼 압력이 세면 셀수록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그와 반대로 압력이 내부로부터 올 때 삼각형 결정들은 서로 떨어지면서 얼개 전체가 무너진다. 알껍데기는 밖으로부터 오는 힘에는 알을 품은 어미가 무게를 견디는 것만큼 단단하고, 안으로부터 오는 힘에는 쉽게 깨고 나올 수 있을 만큼 약하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 마음이 알의 원리를 닮았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파에는 끄떡없지만 자식의 일에는 한없이 약해진다. 자식이 알이라면 어머니는 알의 껍데기다. 스스로 알을 낳고 변방에 물러서서 알의 내부를 지킨다. 그러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알에서 자란 새끼의 몸부림에 기꺼이 무너지고 부서진다.

어머니 이마의 깊은 주름을 볼 때면 책에 쳐놓은 밑줄이 떠오른다.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치듯, 어머니는 삶의 온갖 풍상을 맞을 때마다 당신의 이마에 주름이라는 밑줄을 쳐두셨다. 잊지 않기 위해서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

깊어가는 가을밤, 몸살감기에 신음하며 어머니를 추억한다. 여주 신륵사 정자에 앉아 찬찬히 여강 바라볼 때면 강에서 슬며시 어머니가 올라오신다. 그리고 한 마디 하신다. 내려놓으라고, 내려놓아서 편해지라고 말씀하신다. 나눌 수 있는 건 아낌없이 나누라고, 나누어서 마침내 세상과 하나가 되라고. 천년 고찰의 강변 정자에 서면 먼 옛날 삶의 내려놓음을 노래한 나옹 선사의 시가 저절로 떠오른다.

최준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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