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그리고 1953년 휴전직후 온세상 폐허속에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혹독한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낸 기지촌 여성들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병관리소 필자(筆者)는 지난 11월 19일 케이블 TV 딜라이브 우리방송 박미현 기자와 함께 소요산 자락에 터를 잡은 성병관리소에 다녀왔다 입구조차 찾기 어려운 곳 잡초가 무성한 옛 건물 노숙자들이 거쳐간 그곳에는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었다 양색시들이 머물다 간 이곳은 흔적만 남아있다 짐작으로 헤아려 1층은 진료실 경비 숙직실 식당 및 조리원실 2층은 간호원실 그리고 입원실에는 성병에 감염된 양색시들의 치료를 위해 숙식했던 곳 창가에는 창문마다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로된 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예전 군 내무반 마루형 바닥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애처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의 임직원은 관리소장1명 의사1명 건호원4명 경비원2명 운전기사1명 조리원3명 등 12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전쟁이 낳은 색시는 시집을 가지 아니한 처녀 규수(閨秀)의 준말이며 술집 등 접대부를 말한다 여기에 붙인 말은 서양(西洋)동양에서 서쪽 방향 유럽과 아메리카 미국 외 여러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젊은 여성들이 서양식으로 양장(洋裝)옷을 입어 양색시란 말이 생겨났으며 그래도 양식시 보다 존칭으로 양공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쩌다 다투기도 하면 저속한 말로 양 갈보라고 욕을 했다 갈보는 웃음과 몸을 팔며 천하게 노는 계집이라고 국어 사전에 적혀 있다 양색시의 역사는 주한미군의 역사와 궤(軌)를 같이 한다 1945년 9월 8일 미군 2개사단이 인천항 외곽지 부평에서 38선 이남을 지배하는 점령군으로 주둔하게 된다 1945년 10월에 열린 연합군 환영식에서 한국 여자가 춤추며 노래 부른다는 이유로 관중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부어 행사가 도중에 무산된 적이 있다 한국인들은 한국 여성들이 미군과 접촉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높은 윤리의식도 가난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전쟁으로 살길이 막막한 피난민들은 북녘고향이 가까운 미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전쟁으로 홀로된 부녀자와 고아(孤兒)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미군을 상대로 하는 클럽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보통 기본급과 자신의 손님에게 판 술값의 20~30%를 받았다 이를 드렁크 머니(Money)로 불렀다 하지만 할당된 주스와 술을 팔지 못할 때 드렁크 머니는 턱없이 줄어들었다 수입이 줄어들면 양색시들은 미군과 잠을 자야했다 양색시가 되는 까닭은 다른 사창가에서 일하는 것보다 벌이가 나았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군과 결혼하면 지긋지긋한 가난과 빚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나 새생활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1950년 중반부터 70년 초반까지 피난민 외 전국에서 모여들어 3~7천명이 있었다는 설(設)도 있었으며 미군들은 3만5천명이 주둔했다고 한다 양색시들의 모임단체 민들레회는 동두천 대형 권익단체였다 민들레회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양색시들을 보호하였다 한국 정부는 양색시를 남한의 자유를 수호하는 한미 양국의 우호를 증진시키는 수단이자 외화(外貨)벌이 창구로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따른 희생도 뒤따랐다 주한미군들의 범죄행위도 수없이 일어났다 남산모루 공동묘지에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름없는 양색시들의 무덤들이 흩어져 있다 일제치하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양색시가 있었다 전쟁이 남기고 간 성병 관리소를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복원하여 암울했던 그 시대의 자취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명수 동두천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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