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기미년 3.1운동이 백년이 되었고, 멀리 타국 중국의 상해에 피난하여 임시정부를 세워 공식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선포한지 백년이 되는 2019년이 되었다. 3대를 넘어 4대에 이르는 시간인 백년이 가지는 의미는 그냥 백년이 아닌 우리에게는 특별하고 더 크게 와 닿는 남다른 시간일 수밖에 없다. 백세시대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니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백년이라는 기간 동안 암울했던 시간을 보내고 광복이라는 잠깐의 기쁨도 맛보고, 동족상잔의 아픔과 어처구니도 경험했고, 천지를 개벽하는 발전경험을 통해 극한의 배고픔과 최고의 성찬을 맛보는 한 세대의 시간과, 희생과 강요의 비민주의 시대를 지나 개인의 권리와 행복추구권이 제대로 보장받는 현재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얻어내는데 백년은 충분히 고통스럽게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고통의 긴 시간을 지나 찬란한 새로운 100년을 맞이하는 2019년 새해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그 반성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만큼 현재가 부끄럽지 않은지 자문하고 돌이켜봐야 한다. 지난 백 년 전 우리가 그렇게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고 뛰어다녔던 이유를 물어봐야 한다. 그 날은 그저 교과서에서 만나거나 공원이나 장터에만 존재하는 몇몇의 몸부림이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못났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며,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러웠던 것이며, 서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아팠던 것이며, 거짓을 참으로 믿었던 몽매함과 착함을 구분하지 못했기에 추웠던 것이다. 그렇게 찾고 싶었고 살고 싶어 했던 대한민국 이 땅 곳곳에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일제의 흔적조차 완벽하게 지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100주년이 뭐 그리 대단하게 와 닿겠느냐는 자괴감도 솔직한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100년이면 뭐하고 1천년이면 뭐하겠는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고 이웃을 나무라지만 정작 우리는 그렇게 소중한 과거를 애써 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중요함의 덕목과 가치관의 기준이 달라지는 시대라고 하지만 애써 그들의 자발적인 사과를 고집하는 우리는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들을 넘어서는 것...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처참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과 우리끼리 떠들어대는 적개심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당당하고 정확한 일침을 아끼지 않았던 100년 전의 우리들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 시절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의 큰 목소리나 그들에게 겨누었던 총과 폭탄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상위의식인 것이다. 그들이 가졌던 우리에 대한 끔찍한 콤플렉스를 우리는 끄집어내어 분석해봐야 한다. 오랜 시간 그들을 가르치고 배려하고 이해했던 우리에 대한 그들의 질투심과 적개심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1945년 광복으로 그들과의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100년 후 우리의 모습을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옹알거리고, 길거리에서 소리소리 지르며 단체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을 상대하고, 그런 그들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이 과연 상책인가.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미 우리는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행해봤고 증명해보이지 않았는가. 그들은 늙어가는 국가다. 우리는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젊음이 가능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한들 100년 전, 만세를 부르며 피눈물을 쏟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하겠는가.

유현덕 한국캘리그라피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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