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설’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조상님을 잘 만나서인지 한국인은 서양 유럽과는 달리 매년 두 번 시작한다. 새해 시작하며 작심삼일이 되어버린 결심이 있다면 상관없다. 오늘부터 새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하던 때가 있었다. 그곳에는 구정이 없기 때문에 한국과는 달리 분위기가 썰렁하지만, 한인들은 성당이나 교회 등지에 모여 함께 명절을 지내기도 한다. 떡국도 끓여 먹고 윷놀이도 즐기며 고국을 떠나 사는 쓸쓸한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는 것이다. 제사 지낼 시간에 맞춰 집에 전화를 걸면, 식구들 한 바퀴 도는데 시간도 전화비도 꽤나 들었던 기억이 난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삶을 새롭게 꾸릴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움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늘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엊그제 시작했다 싶더니 벌써 한 달이 지난 것처럼, 새로운 것을 새롭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루게릭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하던 ‘조셉 카이오’(Joseph Caillot) 신부님이 문득 생각난다. 그분은 병으로 인해 대학교 강단에서 강의하고 학생을 지도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학교를 떠날 때 한 ‘포기의 용기’라는 강연은 교수님을 응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을 비롯한 지인 모두의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다.

루게릭 병은 온 몸의 근육이 굳어가며 서서히 생을 마감하게 되는 병이다. 신부님은 같은 병으로 이미 어머니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기에, 발병사실을 알고 크게 상심하셨을 법하다. 신부님은 강연에서 ‘포기’에 대해 생각하시며, 그 병으로 인해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는, 곧 포기해야만 하는 일들을 떠올리셨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닦고 양치질을 하고, 음식을 먹고, 피아노를 치고 책을 읽고, 버스에 올라 타거나 자동차 운전을 하고, 글을 쓰고 컴퓨터로 강의를 준비하고,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 일들을 떠올리면서, 평소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행하는 일들이, 그것을 마지막으로 해야 했던 그분에게는 매일매일 일어나는 기적처럼 보인다고 하셨다.

이제 그분에게 숙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다가오는 시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었다고 하셨다. 그분께는 알 수 없는 미래를 맞닥뜨릴 용기가 필요했고, 그동안 그분이 주고받은 사랑의 힘으로 그 미래를 향해 걸어가고자 하였다. 굉장한 도전이었고 힘겨운 투쟁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용기를 갖고 끝까지 임했고, 브르타뉴 지방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즈음 그분의 이야기를 떠올리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새해의 모든 일들이,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해야만 했던 일 만큼이나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난해는 이미 지났다. 설을 기점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 이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새해 ‘처음으로’ 시작하는 일이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나의 평범한 일상은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다. 어제 생을 마감한 사람이 그토록 하고자 갈망했던 소중하고도 특별한 일로 나의 일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일상은 매일 일어나는 기적과도 같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걷고, 거울을 보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회사에 출근하고, 사람을 만나고 인사 하는 등, 일상에서 하는 모든 것 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것처럼 절박함과 소중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은 매일 나아질 것이다.

새해를 시작하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에, 존재의 소중함에, 가족과 이웃의 소중함에, 세상의 소중함에 눈을 뜰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희망을 일깨울 수 있으면 좋겠다. 복을 기원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미래가 열려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장/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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