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정씨 2세조인 정문도 묘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 464-1(동평로 335)에 있다. 이곳은 조선팔대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팔대명당은 풍수가들마다 꼽는 곳이 다르다. 이는 8개의 명당이 정확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란 의미다. 좋은 경치를 가리켜 팔경이라 하는 것처럼 좋은 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팔대명당이라 부른다. 전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조선팔도명당, 지역을 대표할 만큼 좋은 곳이면 경기팔대명당, 호남팔대명당, 영남팔대명당, 충청팔대명당, 강원팔대명당 등으로 불린다.

정문도 묘는 화지공원 내에 있다. 묘역에 들어서면 도시인데도 숲이 잘 보존된 것에 놀란다. 도시화가 이루어지면 보상금의 유혹 때문에 선산을 파는 문중이 많다. 그런데 동래정씨들은 선산을 도시공원으로 조성해 개발을 피하였다. 오늘날도 건설사들이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아파트건립을 제안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래정씨들은 조상의 묘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어서 이를 모두 거절한다고 한다. 묘지는 한 눈에 보아도 명당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정문도는 고려 현종 때 동래읍의 아전이었다. 중앙에서 고익공이 사또로 부임해왔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어서 화지산에 기가 뭉쳐 있는 혈을 찾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들려서 한참씩 쉬어가곤 했다. 그를 수행한 정문도는 이곳이 명당임을 눈치로 알았다. 고익공은 경상도 안철사를 거쳐 개경으로 영전되어 갔다. 그 사이 정문도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 정목은 고익공이 늘 상 쉬어가던 화지산 남쪽 자락에 아버지를 묻기로 했다. 그러나 정학한 혈처를 알 수 없었다. 마침 상여가 화지산 자락에 이르자 눈이 녹은 것이 호랑이가 걸터앉은 모습과 같은 기이함이 있어 그곳에 묘를 썼다.

정목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18세의 나이로 유학차 개경에 올라갔다. 고익공을 찾아가 아버지를 화지산 자락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자기 딸과 혼인토록 하였다. 27세 되던 해에 성균관에 합격하고, 33세에 예부시 복시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을 거쳐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정점·정택·정항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동래정씨는 조선시대에도 정승 17명, 판서 20명, 대제학 2명, 독서당 6명, 공신 7명, 문과급제자 198명, 무과급제자 484명을 배출하는 등 크게 번창하였다.

이곳의 산세는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801.5m)을 태조산으로 한다. 금정산은 강원도 태백시의 구봉산에서 물운대까지 이어진 낙동정맥의 끝자락에서 가장 기가 세고 높은 산이다. 만덕재를 넘어 금정봉(408m)을 세우고 동쪽으로 한 맥을 뻗어 금용산(149.7m)을 세웠다. 그리고 이곳 주산인 화지산(142.4m)을 지나 황령산(427m)을 거쳐 수영만까지 이어져간다. 정문도 묘는 화지산에서 남쪽을 향해 직룡으로 내려온 맥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청룡과 백호는 화지산에서 좌우로 뻗은 맥에서 비롯된다. 좌청룡은 황령산으로 가는 주능선 자락이고, 우백호는 내백호와 외백호가 겹겹으로 감싸고 있다. 특히 외백호 자락은 내청룡 끝자락까지 감싸고돌아 안산을 이룬다. 현재는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섰지만 양정현대1차와 2차아파트는 이곳 외백호의 끝자락에 해당된다. 멀리 조산으로는 영도의 봉래산이 귀인봉으로 우뚝 솟아 이곳을 지켜보고 있다.

묘지 하수사 아래에는 지당수라 부르는 작은 연못이 있다. 용의 생기를 보호하며 땅속으로 따라온 물이 혈을 감싸 보호하고 지상으로 분출되어 생긴 연못이다. 지당수가 맑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면 부귀한다고 본다.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나온 물들은 연못 아래에서 합수하여 좁은 수구를 통해 빠져나간다. 수구에는 바위가 단단하게 박혀 있어 유량과 유속을 조절한다.

동래정씨들은 대대로 풍수지리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왔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13세정사 묘 역시 조선팔대명당으로 평가 받는 곳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자부심은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 풍수의 긍정적 힘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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