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의 ‘나의 소원’ 中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생각나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를 꼽으라 하면 손가락 발가락이 모자를 정도이지만, 그중에서도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일 정도로 터프한 사나이 ‘백범 김구’는 모두가 인정할 위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가·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됐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런 그의 후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백범 김구의 후손답게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의 아들부터 증손자까지 공군 장교로 국가에 헌신하는 등 병역 명문가로 위세를 떨쳤으며 증손자 김용만(34)씨는 공군 장교 전역 후에도 방산업체 근무와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사업추진단 시민위원 310단장’을 역임하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그의 뒤로 보이는 백범 김구의 동상 얼굴과 많이 닮아 보였다. 김용만씨를 만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유산으로 남기고 기념해야 할 3·1운동에 대해 들어봤다.


-3대가 공군으로 근무하는 등 병역 명문가입니다. 김구 선생의 후손으로 애국심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집안 어른들께서는 애국심을 길러야 한다든지 애국에 대해 특별한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교육하고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증조부님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애국에 대해서는 가족 모두가 받아들였고, 또 한편으로는 의무적인 부분임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군 복무에 있어서는 중학교 1학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두 번 생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대한민국 공군 창군에 참여하신 조부님께서 공군 학사 장교 2기로 임관하셨으며, 아버지께서는 70기로 그 길을 좇았는데, 저도 자엽스럽게 125기로 임관식을 올리게 된 것이죠. 증조부님의 광복군 창설까지 인정을 받으며 4대가 군에 기여한 가문으로 특별상을 받게 됐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가 다녀오는 군대이고, 국민으로서 당연히 이행하는 국방의 의무로 받는 상이기에 사실 부끄러운 면도 있더라고요.”

-공군을 선택하신 계기와 전역 후에도 국가를 위한 기업체에서 일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1949년 공군의 창군에 조부님이 참여하셨고, 제6대 참모총장을 지내셨습니다. 그 이후에도 국토부장관, 국회의원, 대만대사 등을 역임하셨는데, 주위 분들의 기억 속에는 공군의 참모총장이 지배적이셨던지 많이들 ‘장군님’으로 찾으셨고, 본인께서도 공군인으로써의 삶에 큰 자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부친께서도 공군 장교의 길을 택하셨고, 저 또한 자연스레 공군 정보 장교로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정보 특기 중에서도 특히 무장 쪽에 대한 분석 업무를 상당 부분 접하게 됐는데, 마침 군 전역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중 ‘나는 애국하러 회사 갑니다!’라는 문구로 홍보를 하던 방산업체를 접하게 됐어요. 회사를 공부해보니 마침 무장 전문 업체라는 것을 알았고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입사를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2014년 전역 시점에 맞춰 공채로 입사에 성공하게 됐습니다. 어렸을 적부터(특히 군 복무 기간을 통해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직군에서 직업을 택하고자 했던 터라, 저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직장인 것이죠. 총 한 자루 폭탄 하나 없어 중국으로부터 빌려 가며 열악한 상황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우리의 모습에서 첨단 무장을 자주적으로 개발하는 국가가 됐다는 생각에 문득문득 직장을 통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증조부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가 언제였고, 성장을 하면서 부담은 없었나요.
“일찍부터 집에서 어른들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 증조부님에 대해 알았는데, 당시 어린 나이로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는 제대로 이해는 하지 못했었죠. 집안 어르신들께서도 증조부님에 대해 알려주려 하시지는 않으셨던 걸로 기억해요. 오히려 부모님께서는 증조부님과 관련된 큰 행사나 중요한 자리는 내가 거만해질지 모른다는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게 하셨어요. 유년기에는 이런 무지함 속에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사진 속에 할아버지는 누구시길래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여전히 그리워하는가 내심 궁금했던 적은 있었습니다. 청소년기 또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며, 증조부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활했고, 그 기간에는 나만의 모습을 찾고 만들어가는 시간을 가지며, 부담에서 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군에 입대했고 장교 훈련 과정을 끝내고 임관을 한다고 하니, 임관식에 여러 언론매체가 찾아왔습니다.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상태로 16주간 훈련을 받아야 했던 터라, 미리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나에게 엄청난 질문 공세가 시작됐고, 많이 당황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호되게 증조부님이란 인물의 영향력을 느끼고서야 가문의 성격과 의무를 배워가기 시작했고, 증조부님에 대해 배움이 커질수록 부담 또한 비례하게 커졌어요. 나만의 방어기제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부담을 자랑스러움으로 느끼고자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한계에 부닥칠 때가 많고, 아직까지 그런 부담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기까지 미국에 거주했지만 시민권은커녕 영주권도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유가 있나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친일 세력의 핍박을 피해 해외로 이민을 간 분들에 관한 얘기를 자주 들었고, 어떤 이들은 가고 싶은 이민도 재정적 어려움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반드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어떠한 형태로든 그런 모습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자 했습니다. 광복과 주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지켜온 국가에서 이런 아픔이 여전히 팽배한다는 것이 믿기 어렵습니다. 애국심으로 희생을 주저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미약하나마 제 작은 힘을 대한민국이 더 나은 나라로 만드는데 보태고 싶습니다.”

-올해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요.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요.
“서울시는 2016년 말부터 3·1혁명 임시정부 100주년 사업을 준비했고, 저는 2017년 5월부터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약 2년이라는 시간동안 독립운동 기념시설 조성, 시민참여 행사 및 교육, 독립유공자 예우 강화 등 3개 분야에서 약 30개의 사업을 준비해왔는데, 그렇다보니 올 한 해는 열심히 준비한 시험을 치르는 느낌입니다. 우리 선열들께 부끄럽지 않고 당당한 후손의 모습으로 맞이하도록 그간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주셨는데, 그 마음들은 시민·국민들의 참여와 감동을 통해서 비로소 빛을 발할 것이기에 부디 올 한 해를 마음으로 느끼며 참여해주시기를 이 지면을 통해 다시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서울시 3·1운동 100주년 사업추진단 시민위원 310단장’으로,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100년 전 3·1혁명은 누구의 지시 하나 없이 국민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낸 혁명입니다. 서울시는 100주년인 올해 이런 점을 감안해 다시 한번 시민·국민 주도의 행사를 만들어 당시의 모습을 감히 재연해보고자 노력했고, 그 맥락에서 310명으로 구성된 시민위원단을 출범했습니다. 시의 행사들은 대부분이 이 시민위원단을 위주로 운영이 되고 있으며, 특정 집단이나 정부만의 동떨어진 행사가 아닌 민초들이 주인인 100주년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그 시민위원단의 단장을 맡게 됐습니다. 우리 시민위원단은 행사의 홍보부터 기획 및 집행까지 전 단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고, 그 중간에서 시와 시민위원들 간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코스와 그날의 감정은 어땠나요.
“중국에서 임시정부 어르신들의 발자취를 좇아가기 위해 11박 12일로 다녀왔습니다. 바쁜 일정과 많은 활동으로 코가 헐고, 감기에 걸리는 등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그럴 것이 마음이 뜨거워졌다가 한참 차가워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어요. 타국의 땅 위에 우리의 선열을 기리는 기념관과 그곳을 찾아오는 우리 국민을 보며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고 뜨거웠습니다. 반면, 임시정부의 최초 청사(상해 서금2로)의 위치, 광복을 맞이했던 우리 선열들의 삶의 터전(충칭 토교촌) 같이 지금은 무서우리만큼 무관심 속에 방치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또 차가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불타올랐다가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리가 좇은 발자취 경로를 가며 몇몇 곳에서 무궁화 조화를 찾을 수 있었는데요. 마치 우리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편히 해주기 위해 만든 이정표 같은 조화였는데, 아무런 비석이나 안내판 하나 없는 초라한 우리의 뿌리에 놓인 그 조화가 한 줄기의 희망같이 느껴졌고, 아직 우리 어르신들을 제대로 기리고자 하는 마음들이 어딘가 남아 모이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최근 남북, 북미의 관계가 좋았다가 다시 악화되고 있는 상태인데요. 남북 관계나 통일에 대한 생각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1948년까지도 한반도는 하나된 민족이었습니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가 어려워지고 한없이 약해져 있던 순간, 소련과 미국의 정치적 이념의 차를 신탁통치로 우리 땅에 드리웠고, 그렇게 타국의 영향에 나라가 분단됐는데요. 그 분단을 환영한 내부의 세력들도 있었기에 타국의 영향만을 원망할 수 없는 것이 더더욱 원통하고 한스럽지만, 일본과 친일들로 시작된 분단을 하루빨리 제자리로 되돌려 놓아야만 민족상잔의 치욕 속에 받은 상처들이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역사는 우리들이 기리는 만큼 힘을 얻고, 그 힘은 옳고 그름을 판단해주는 하나의 기준이 돼 미래를 준비하게 해줍니다. 역사를 통해 어떤 이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역적이 되고, 어떤 이는 영웅이 되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바로 잡아가는 모습 속에서 우리만의 역사를 쓰고 있고, 시간은 다시 흘러 우리의 후세가 그 모습을 배울 것인데, 그들 앞에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전국에 남아있는 항일 운동 유적지가 도시화 등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후손들로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가지 않는 길은 사라지기 마련인데, 거꾸로 해석하면 없던 길도 만들 수 있는 것이 관심과 발걸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를 어떻게 모시는 지로 우리의 후세는 우리를 바라보고 또 대우할 것입니다. 3·1혁명 그리고 임시정부, 명실상부 대한민국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갖고 있는 역사의식을 되돌아보고 하루빨리 사라져가는 우리의 뿌리를 놓치지 않고자 노력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클 것입니다.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힘으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부는 조직적, 체계적으로 뿌리를 보존하고 온전히 역사 속에서 흐를 수 있게 만들어주기를 기원하며, 항저우 어느 아파트 단지 아래 묻혀 계신 일강 김철 선생님이 하루빨리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봅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통일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요.
“‘소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증조부 시대에는 일제로부터 국가의 독립이 소명이었고, 할아버지 시대에는 독재에 맞선 민주화, 아버지 시대에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산업화가 시대적 소명이었다면, 우리 세대의 시대적 소명은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소명을 갖추기 위해 나 자신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취재=김동성기자/ 사진=김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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