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문제의 해결하기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과 지위를 두고 우리 정부와 언론은 중재자라는 표현을 사용해오고 있다.

하지만, 중재자라는 표현의 오류를 지적한 국제법 교수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중재자는 원칙적으로 어떤 사안의 판단자, 결정자를 의미한다. 영어로는 ‘Arbitrator’이다. 남한이 북핵 문제의 중재자라면 독립된 제3자로써 북한과 미국이라는 당사자들 사이의 다툼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이어야 한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북핵 문제의 직접 당사자이지만, 우리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최종 결정권자로서가 아니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원활하고 합리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재자보다는 중개자라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중재자와는 달리 중개자는 사안에 대한 결정권이 없으며, 갈등관계에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원활한 소통을 매개하거나 때로는 분쟁해결의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도 문재인 대통령을 중개자(Mediator)라고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중개인의 예가 부동산 중개사이다. 다만, 북미 핵 갈등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단순한 중개인보다는 조정자적인 성격까지는 인정될 수 있다.

그런데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2일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북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목하면서 “오지랖 넓은 ‘중재자’나 ‘촉진자’가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며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 돼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다.

김정은의 표현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우리 대통령은 중재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 핵의 영향권 안에 있다. 따라서 북한과 미국의 문제이기 전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문제이다. 남의 일을 처리하는 중재자나 중개자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의 자격과 책임감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이 핵무기와 함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한 이후부터, 북한의 핵 문제는 남북문제를 넘어 미국, 일본, 심지어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국제적인 문제로 확대되고 말았다. 결국, 우리가 중요한 당사자이지만 해결 주체로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북한의 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과 서방세계를 겨냥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연극도 등장인물이 적을수록 쉽게 이해되는데, 등장인물이 많아지고 새로운 주연이 나타나면 기존 주연은 조연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처지가 그렇다. 김정은의 당사자성 주장은 그래서 틀렸다. 당사자이지만 당사자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다.

둘째, 민족주의적 접근이다. 즉,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라는 것이다.

민족적 동질성이 있으니 우리는 하나이며, 우리의 이익을 위해 남한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주장이다.

한편으로 보면 타당성이 있으나, 선동적인 측면이 크다. 민족적 동질성은 우리가 지켜오고 있는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한반도이고, 60년이 지난 일이지만 동족간 전쟁을 겪었다. 전쟁으로 인해 민족보다는 한미동맹이라는 굳건한 안보공동체가 형성, 유지되고 있다.

민족이라는 가치를 주장하면서, 한미동맹을 흔들려는 것이 선동적이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다문화사회로 진화하고 있는 우리가 민족적 동질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럽다.

그나마 긍정적인 것은 올해 말까지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협상의 판을 깰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 인내심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 스스로 먼저 인내심을 갖겠다고 하며, 남조선당국과 손을 놓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판을 깨기에는 너무 많이 왔고, 뒷감당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북미 협상의 진행 과정을 보면서 북한이 미국식 협상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는 접을 수 없다. 먼저 문화가 다르며, 미국의 정보력과 협상력 또한 무시하면 안 된다. 트럼프가 통 크게 응하는 것 같지만, 최상의 전문가와 변호사들이 문구 하나하나를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 큰 거래가 지도자의 결단으로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심각한 오판이다.

류권홍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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