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적 변화로 우리의 사회ㆍ경제적 삶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의료시장에도 ICT와 진단기기 발전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디지털 헬스케어인 원격의료 도입이 요청되고 있다. 원격의료는 진료실을 넘어 전화, 영상통화, 이메일, 앱 등의 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의사가 환자에 대한 진료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도 이미 원격의료시장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원격의료 도입 확대에 대한 진행이 더딘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원격의료는 아직 보건복지부, 국방부, 해양수산부, 법무부 등에서 제한적 시범사업만 시행되고 있으며, 20여년 넘게 찬반 공방만 이어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가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 병·의원의 도산, 의료 질 하락 등을 우려하며 원격의료에 대해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공공보건의료를 보충할 수단 중 하나로 의료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대면진료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곤란한 경우에만 원격의료 활용이 검토되었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시범사업을 토대로 군부대, 원양어선, 교정시설, 의료인이 없는 도서벽지 등 의료접근성이 취약한 4개 유형에 한해 의료인과 환자 간 원격의료를 제한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이다. 의료계의 반발에 부딪혀 원격의료 확대에 미온적 태도를 취하는 입장과 별도로, 얼마 전 사실상 원격의료에 해당하는 스마트의료에 대한 성과평가 연구를 발주해 논란이 되고 있다.

최근 문재인정부에서는 바이오헬스를 비메모리 반도체, 미래형 자동차와 함께 차세대 3대 주력산업 분야로 중점 육성하겠다는 계획인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전략’을 발표하였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 바이오헬스산업은 국민건강 증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성장가능성이 높은 유망 신산업분야이다. 그런데 이번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전략’에도 여전히 원격의료 규제개선이 포함되지 않았다. 현재 국내에서는 원격의료 기술 개발 제품과 서비스가 규제로 인해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어, 관련 기술을 개발한 국내 기업들이 내수시장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카풀 등 공유경제와 마찬가지로 원격의료 역시 의료계의 저항과 정부의 소극적 대응에 기인한 규제에 가로막혀 있다. 원격의료 시장이 확대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의료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제대로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원격의료 목적과 사업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종합적ㆍ체계적 발전방안을 수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제도적 과제이다.

의료정책의 목표는 의료서비스 질 제고를 통한 환자의 건강권 확보에 있다. 공공성을 확보한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과 운영을 통해 환자의 편의 증진과 의료인들의 자율성 보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의료계의 저항에 부딪혀 문제를 회피하거나 의료계의 주장을 단지 기득권 수호를 위한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의료계와 함께 의료체계 전반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 나가는 방향으로 정책 개선을 이루어야 하며, 바이오헬스 기술혁신 생태계 조성과 규제 합리화 정책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적 변화가 가져오는 사회ㆍ경제적 변화가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도적 혁신이 필요하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회피하기 보다는, 선제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정확히 판단하고 현명하게 대응해야 한다. 바뀔 수 밖에 없다면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김선희 서원대 사회복지학부 복지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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