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副祭·Deacon). 사전적 의미로 주교의 협력자이며, 사제를 도와 세례 및 혼인 성사를 집전하고 강론·장례 예절·성체 분배·축복 등을 할 수 있는 가톨릭 성직자 품계의 하나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사제 서품을 받기 직전의 신학생들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의정부교구 양주백석성당에서 부제 직무 수행 중인 문주석 레오 부제는 내년 사제 서품을 앞두고 있다.

올해 문 부제의 나이는 서른일곱, 빠른 83년생이기에 사회적 나이는 서른여덟이다.

통상 신학생들이 군 복무기간 포함 10년이라는 기간을 거쳐 사제서품을 받는 것과 비교할 때 늦깎이 신학생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는 간호사였다.

대학병원 근무경험까지 있었던 전도유망한 간호사에서 늦은 나이에 신앙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때 이른 무더위에 검은 사제복을 입고 나타난 문 부제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내며 “치유적 관계에서 오는 영적 갈증 때문이었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간호사로서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고, 남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른한 살 청년 문주석은 세속의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신학교에 들어갔고, 이제 곧 사제 서품을 앞둔 서른여덟 문주석 부제가 됐다.

신학교에 입학하던 2012년, 서른하나 청년 문주석이 삶 속에서 찾았던 ‘치유적 관계’와 ‘영적 갈증’에 대해 들어봤다.
 

―보통 신학생이 되려는 학생들은 예비신학생을 거치기 마련이다. 유년기 신앙생활은 어떠했나.
“사실 예비신학생 모임에 가고 싶었으나, 기회가 주어지질 않았다. 원래는 서울에서 계속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무렵 의정부로 이사왔다. 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과정에서 성당을 또 옮기게 됐다. 신자가 아닌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가톨릭 교회는 최소한의 행정구역이라고 해야 하나, 교구(敎區)가 있고, 그 안에 본당이 있다. 만약 내가 어느 동네에 살다가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 다니는 성당도 옮겨야 한다. 한창 민감할 사춘기 때 성당을 자주 옮기다보니 새로운 환경에 늘 적응해야 했고 예비신학생은 아쉽게도 겪질 못했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항상 성당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노는 것이 좋아 본당을 자주 옮기면서도 또래 친구들과 새롭게 만나며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었다.”

―첫 직업은 간호사였다고 들었다. 당시 다소 생소했던 남자간호사라는 직업을 택한 이유가 있었는지.
“음… 이렇게 말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딱히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고3 때 본 수능이 생각보다 점수가 안 나왔다. 원래 가고 싶던 대학, 가고 싶은 과가 있었는데 안 되다 보니깐 일단 대학교를 먼저 정하고 그 중에서 가장 취업이 잘 될 것 같은 간호학과를 갔다. 그리고 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기 전까지는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생각없이 신나게 놀기만 했었다.(웃음) 그런데 군대 안에서 어떤 계기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2004년 이라크 자이툰부대로 파병을 가게 되면서다. 전쟁이 끝나고 복구과정에 있었던 이라크에서의 6개월 경험은 나에게 간호사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기회가 됐다. 의무병으로 그곳 병실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을 돌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 이후 피폐해진 삶 속에 허덕이는 그곳 주민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교감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그렇게 파병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곧 전역하게 되더라.”

―간호사 때 생활은 어땠나.
“원래는 일반병원에서 근무하기 보다는 보건소나 보건지소 등에서 근무하는 형태의 지역사회에 대한 간호서비스업을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무원 공부를 더 하려고 하니 알바만으로는 학비랑 생활비가 충당이 안 돼서 일단 동네에 있는 병원에 취직했다. 4년간 그 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로 중환자실에 있었다. 동네병원 특성상 정말 중환자나 위급한 환자가 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학병원과 같은 큰 병원서 치료받다가 더이상 치료가 안 되거나 아니면 또다른 이유로 장기입원하는 환자들이 많다. 재미있던게 동네병원이다 보니 환자들과 개인적 유대가 쌓일 때가 있더라. 중환자실에 장기입원하는 환자 중에는 알콜중독으로 오는 분들도 있는데, 이분들이 한 번만 오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어느정도 상태가 호전돼서 퇴원한 환자들을 동네 길거리서 만나면 ‘요즘엔 술 안 마셔요? 그만 좀 마셔요’라며 안부를 묻게 되더라. 그래도 알콜중독이라는 게 다들 알다시피 치료가 힘들어서 또 병원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간혹 한동안 오지 않으셔서 근황을 알아보면 결국 돌아가신 분들도 있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환자들이랑 지내면서 나름 지지적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별 생각없이 들어갔던 간호과가, 사실은 돈 못 버는 직업은 아니라 들어갔던 곳인데 이라크에서 이어 중환잔실에서 또다시 사람들을 돌보는 것에 대한 숭고함을 느꼈다. 만약 큰 병원에서 처음 일일 시작했으면 일에 치여 살았을텐데, 동네병원에서 사람들과 교감하고 ‘치료적 관계’를 맺으면서 일에 대한 보람이 커졌었다.”
 

―나름 간호사로서 소명의식을 깊게 느꼈던 것 같은데, 신앙의 길을 택하게 된 터닝포인트는 언제였나.
“동네병원서 나름 보람도 느꼈지만, 열악한 근무여건으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로는 피하기 어려웠다. 어느 병원이나 그렇지만 당시에는 오프(휴무)없이 10일 연속 일할 때도 있었다. 인력이 부족하니깐. 그래도 마침 도움이 됐던 게 병원 근처에 다니던 성당이 있다는 것이었다. 일 끝나면 성당에 가서 예수님상이나 성모상 보면서 그날 하루 힘들었던 것들 이야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동네 아저씨이나 성당 지인들 만나 놀기도 하면서 의지를 많이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신앙생활이 없었으면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와중 그냥 일을 그만두고 인도와 네팔로 두 달간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뭐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가고싶다는 생각만 있던 데라, 홀홀단신으로 가봤다. 여행 떠나기 전날 낮 10시 미사에 참석했는데, 당시 신부님이 나를 지목하면서 ‘저기 맨 끝에 앉은 청년이 조만간 봉사를 위해 인도로 떠납니다’라고 말을 해버렸다. 난 그냥 여행하러 가려는 거였는데 말이다. 안 그래도 사람들 돌보는 일을 했는데 굳이 여행까지 가서 봉사할 생각은 없었다.(웃음)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안배였지 싶다. 결국 인도 콜카타의 마더하우스(성 마더 테레사 수녀가 임종 전까지 봉사했던 곳)에서 4주가량 봉사하게 됐다. 장소가 마더하우스다보니 전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파트는 경증환자쪽이었다.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하려 간 여행이었지만, 그곳에서 환자들에게 밥 챙겨주고, 약 발라주고, 청소도 해주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환자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하느님 이름으로 모인 단체에서 사람들이 돌봄받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네팔에 도착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랑 1박2일간 트레킹을 했는데, 산 위에 올라가보니 우리나라 산에서 본 것과는 또다른 웅장함을 느꼈다. 그때 생각을 했다. 아 이걸 만든 양반, 아니지 분이 있다는데. 신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들더라. 여행을 다녀와서 이제는 나도 결혼 준비도 해야하니깐, 다시 돈을 벌기 위해 대학병원에 취직했다. 대학병원에서 생활은 이전 동네병원서 일할 때보다 더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갔다. 간호사를 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사람들이랑 교감하고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는데, 직장의 규모는 커졌지만 그만큼 영적인 목마름이 생겼다. 특히 인도 콜카타 마더하우스 봉사활동 중 신앙 안에서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느끼고 난 뒤인터라, 대학병원에서는 전혀 그런걸 느끼지 못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15년, 20년 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곳은 어디인가 생각이 깊어졌다. 결국 답은 성당 안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서는 아주 짧은 6개월간 대학병원 생활을 마치고 예비신학생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신학생이 되겠다고 했을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
“우리 부모님은 워낙 신앙생활을 나보다도 더 열심히 하셨던 분들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응원하셨고, 특히 아버지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신학생이 될 것을 종종 권유하셨다. 늦은 나이에 신앙의 길을 고민하고 있으니 아버지께서도 놀라시긴 했지만 지지해주셨다. 다만 ‘너 그나이에 가서 공부는 할 수 있겠냐’며 걱정은 하셨다.(웃음)”

―신학교 안의 삶은 매우 고되다고 들었다. 늦깎이 신학생 생활은 어땠나.
“다니던 성당에서 친한 친구들이 신학교에 들어가고, 신부가 되는 모습을 지켜봤었다. 일단 간접경험은 충분한 상태였다. 입학할 때 나이가 서른한 살이었는데, 나보다 생일 빠른 사람이 동기 47명 중에 2명밖에 없었다. 뭐 저는 이미 나이를 먹고 들어간 사람이고, 사회생활도 해봤기에 다른 신학생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크게 와닿지 않았다. 외려 달관한 듯한 태도 때문에 건방지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는 했지만, 한 해 두해 지나며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게 신앙생활과 학교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풀게 됐다.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에게 원하는 세가지 덕목이 있다. 3S라고 하는데 라틴어로 Sanctitas(성덕·영적인 건강), Scientia(지혜), Sanitas(건강)이다. 프란체스코 교황 취임 이후에는 Relationship, 즉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본다. 나 역시 이게 사제의 삶에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고,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사제 서품까지 반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사제가 되고 싶은가.
“사회생활을 할 때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은 신앙이었다. 힘든 직장일을 마치고 성당에서 얻었던 위안. 어느 때나 성당에 다녀오는게 좋았다. 내가 신앙생활 안에서 평안함을 얻었던 것처럼 모든 일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목을 하고 싶다.”

황영민·노진균기자

사진=노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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