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최초의 3·1만세운동은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기도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개성이다. 3월 3일 개성군 송도면 소재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개성 시민들도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대는 1천여 명으로 늘었다. 이날 개성군 송도면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이형순의 지도하에 1천 5백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하였고, 밤 2시까지 시위는 계속되었다. 

 

개성의 최초의 만세운동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주도하였다

개성에 독립선언서가 전해진 것은 1919년 2월 28일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명인 오화영 목사가 동생 오은영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개성의 강조원 목사에게 전달하였다. 이 날 독립선언서 배포를 위한 회합이 열렸으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독립선언서는 개성 북부 예배당 지하실 석탄더미 구석에 감추어졌다. 

다음 날인 3월 1일 독립선언서는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 유치원 교사 권애라에게 전달되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사람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이는 개성 남감리파 북부예배당 여전도인 어윤희였다. 이날 오후 2시 어윤희가 같은 여전도인인 신관빈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개성 시내에 배포하면서 3·1운동 소식이 개성 전 지역에 전해졌다. 3월 2일 어윤희와 권애라 등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기도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커튼을 잘라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튿날인 3월 3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주도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과 개성시민이 가세한 시위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만세운동은 3월 4일에도 이어졌다. 이날의 시위 역시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나팔을 불면서 시위를 하였다. 오후에는 시민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6백여 명으로 늘어났고 시가행진하면서 여러 차례 경찰과 충돌하였지만 해산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였다. 

경기도 최초의 3·1만세운동인 개성 만세시위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는 여교사, 여전도사, 여학생 등 여성이었다. 3·1운동은 한국 역사에서 여성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묻가 되었다.

 

개성의 여성독립운동가들 서대문 감옥에서 유관순을 만나다 

공교롭게도 개성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들 모두 시위 이후 유관순과 인연을 맺는다. 개성 시위를 주도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3ㆍ1운동 주동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는데 여기서 유관순을 만난다. 2019년 2월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 유관순의 여감방 동료로 나오는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유관순과 함께 감옥 내에서도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 감옥에서의 가혹한 통제에 저항하였다. 

3월 3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시위 준비 단계부터 참여한 여학생 조화벽은 유관순의 올케가 되었다. 조화벽은 개성 시위 후 3월 말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고향인 양양으로 가서 양양감리교회 청년지도자 김필선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4월 4일 양양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피신하였다. 그 후 공주영명학교 교사로 재직 중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을 만나 결혼하였으며, 유관순이 옥중에서 걱정한 동생 유관복과 유관석을 잘 보살폈다. 

 

1910년대 개성의 민족 교육

개성에서 경기도 최초의 만세운동이 펼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10년대 개성의 학교에서 민족교육이 철저히 펼쳐진 덕분이다. 19세기 말부터 경기도 개성,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등 한반도 북부 지방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고, 20세기 초에는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1919년 개성의 3·1운동을 주도한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모두 기독교 계열의 학교이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역사는 1899년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 캐롤이 개성 교외 '쌍소나무집'이라 부르던 초가집의 주일학교에서 시작된다. 주일학교는 1904년 개성여학당, 1908년에는 호수돈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정식 학교로 변화하였다. 1916년 호수돈여학교는 호수돈여자보통학교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리되었고, 유치원도 개원하였다. 한영서원은 1906년 윤치호가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 후원을 받아 설립한 학교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성에는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개교하면서 학생들을 교욱시키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북부지역의 분위기는 반일적이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한영학교 초대 교장 윤치호를 포함하여 북부지방 기독교 지도자를 대거 검거한 '105인 사건'은 다른 지역보다 강한 반일 의식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개성은 고려의 옛 도읍지로 우리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있고, 인삼과 개성상인으로 대표되는 경제력이 있는 지역이다. 반면에 일찍부터 일본인에 의한 경제침탈이 이루어져 다른 지역보다 반일적인 분위가 높이 형성되었다. 

1910년대 개성 지역의 학교에서는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에 저항하는 반일의식이 교육되고 있었다. 한영서원에서는 1913년부터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교육하는 『초등본국역사』를 교재로 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1915년에는 한영서원가, 애국가 등이 실린 『창가집』을 간행하여 학생 교육 교재로 활용하였다. 『창가집』은 한영학교만이 아니라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도 전파되었다. 개성에서의 만세 시위가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시작된 것은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성의 초기 만세운동을 주도한 또 하나의 세력으로 개성 지역학교를 졸업한 청년과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독립개성회라는 비밀결사가 있다. 조선독립개성회는 서적 판매업을 하는 박치대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 유흥준, 개성학당 학생 임병구 등이 조직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단체 설립 목적을 담은 '개성회 주의서(開城會主意書)'를 개성군내 학교에 배포하고 학생을 조직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개성군의 3·1운동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3월 26일에는 진봉면과 중면에서, 3월 29일에는 상도면에서, 3월 31일에는 광덕면에서, 4월 1일에는 중서면에서 시위가 펼쳐졌다. 특히 동면에서는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 동안, 영북면에서는 4월 1일부터 6일까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남북 학계는 3·1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개성은 현재 북한 지역에 편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북한은 3·1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김정인 교수의 연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은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본다. 3·1운동 배경으로는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을 중시하고 있다. 전개 과정에서 3월 1일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만세운동의 주체로서 노동자와 농민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3·1만세운동을 3·1인민봉기라 부른다. 민족대표 33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3·1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꼽지 않으며, 3·1운동의 대외적 영향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남한의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다.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마다 차이를보이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을 실패한 운동으로 평가하는 연구자도 있었지만, 현재 학계는 대체적으로 3·1운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성공적인 민족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3·1운동에 대한 해석에서 남북 학계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인식이 일치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3·1운동이 반일민족운동으로 기념비적 사건이라는데는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실현 가능한 남북 학술교류를 위한 제안

2019년 2월 13일 독립기념관 주최로 프레지던트호텔에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학술포럼’이 개최된 바 있다. 필자도 이 자리에서 「경기·강원도 북한 편입 지역 3·1운동 사적지 조사 성과」를 발표하면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 공동 학술회의를 제안하였다. 독립기념관 담당자들도 토론 시간에 남북 학술 교류에 대한 강한 희망과 기대를 표명하였다.

2018년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9월 평양공동선언’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그를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협의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합의 내용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맞물려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된다.

앞으로의 과제는 남북 간의 학술 교류를 통해 쌍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 일이다. 남북 간에 역사인식을 좁히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더육이 역사 해석은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기대하였던 3·1운동 100주년 남북 공동기념행사가 이루어지지 않은데서 얻는 교훈이 있다. 앞으로 남북 간의 학술교류는 남북 간 역사 해석에서 차이가 크지 않은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인 202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이다. 경기도의 정체성인 실학 등의 주제는 남북간에 역사 해석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주제이다. 경술국치, 실학 등의 주제는 앞으로 남북 간에 공동으로 연구하고 교류할만한 주제이다. 특히 남북공동 실학학술회의 개최 문제는 2006년 경기문화재단과 북측의 민화협 사이에 개최 합의서를 교환한 바 있다. 아직 실행되지 않았으니 이 합의서는 여전히 유효한 합의서이다. 이 꺼진 불씨를 되살리는 일이 경기도가 해야할 첫 번째 일이라 생각된다.

강진갑(경기학회장, 한신대 외래교수)


이 글을 쓰는데 김정인 교수의 ‘오늘과 마주한 3·1운동’(2019), 김정인·이정은 박사의 ‘국내 3·1운동 1-중부·북부’(2009)에서 도움 받은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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