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면책결정을 내리면 채무자의 채무는 모두 면제된다. 때문에 개인 파산 절차는 채무를 면책 받기 위한 절차와 다름없다.

관련법은 몇몇 불허가 사유를 제외하고는 채무자를 면책하도록 명시하고 있으며, 당연히 면책불허에 대한 판단은 법관이 한다.

하지만 지난해 개인파산 신청건수 4만3천397건.

법원이 조사하고 심리하고 결정을 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면책불허가 사유에 대한 조사는 파산관재인(일반적으로 변호사가 맡는다)이 도맡아 한다.

필자는 법원의 파산관재인 업무를 십 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일 년에 수백 건의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기 마련인데, 이하는 필자가 파산관재인으로 일하면서 처리한 사건 중에 면책불허가 결정을 내린 사건의 예이다.

강 씨는 40대 중반의 건설관련 컴퓨터그래픽 디자이너였다. 비슷한 연배의 처와 결혼하여 사내 아이 하나를 두고 있었다. 강 씨는 지난 2014년부터 2015년 사이에 서너 차례 일본, 동남아로 출국하여 몇 달이 지나서 입국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지난 2015년 12월 입국했고 마지막 입국 즉시 강 씨 부부는 법원에 파산면책을 신청했다. 해외에서 컴퓨터관련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파산면책 신청을 했다고 한다.

강 씨의 잦은 입출국은 성장세를 멈춘 국내 건설경기를 기대하지 않고 동남아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도전일 거라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사업이 실패했지만, 강 씨의 실패는 앞으로 그의 인생에서 분명 좋은 밑거름이 되지 않겠는가.

그들 부부의 파산신청 이유를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면책결정을 위해서는 강씨가 국외로 떠나기 전에 보유하고 있던 전세금이 어떻게 소진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했다.

큰 뜻을 품고 동남아로 향했던 그래픽디자이너와 그의 아내. 그들의 면책사건이 꼬이기 시작한 건 그 때부터였다.

강 씨는 전세금과 출국 직전에 대출받은 대출금의 사용처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구심만 더 커져갔는데, 한참 지나서야 스스로 밝힌 강 씨 부부의 출국 이유는 빤한 얘기지만 희극적인 스토리였다.

강 씨 부부는 개척교회의 신실한 목자였다.

강 씨 부부가 다니던 개척교회의 목사가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았는데, 지난 2014년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한다는 계시였다.

신심이 깊은 강 씨 부부와 신도 30여 명은 지난 2014년 11월 말 전쟁을 피하려고 필리핀으로 출국한다. 그해 12월 31일에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웬걸. 막상 지난 2015년 새해가 밝았는데, 너무나 평온한 해돋이 풍경이 TV에 비쳐졌던 것이다. TV를 보고 있던 30여 명의 신도들과 강 씨 부부는 망연자실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못 해석한 것이다.

그들은 비자기간 만료로 추방되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동네 창피한 일이라 정신을 수습하고 출국한지 사흘 만에 다시 일본으로 출국하게 된다.

일본 출국하면서 그들 스스로 새로운 명분을 찾았다.

신의 계시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신의 계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4개국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라는 것.

그들은 일본, 대만, 태국을 거쳐서 지난 2015년 12월 입국한다. 짐작하듯이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쓰고 난 상태였다.

필자가 강 씨에게 해외에서의 생활을 구구절절 묻지 않았다. 강 씨가 제출한 대만의 숙박업소에서 모두 V자를 한 사진, 버스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 아이들, 출국심사중인 방콕공항에서 지친 표정의 사진들로 예측이 가능했다.

필자는 법원에 강 씨의 사건에 대하여 면책불허가 의견을 냈다. 자신의 그릇된 신념으로 많은 채권자들은 손해를 보았으며, 그들의 가족 또한 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 빤한 일이었다. 강 씨도 조사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인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필자가 인간적인 호기심이 들어 강 씨에게 물었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전 재산을 팔아서 피난길에 올랐다면, 부모님은 왜 안 모시고 갔나요? 몇 년 지난 일이라 강 씨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춘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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