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과 마주한 팔달구 북수동 한 골목에 자리한 ‘대안공간 눈’은 수원 토박이 조각가 이윤숙(60) 전 대표가 2005년 자가(自家)를 개조해 만든 전시공간이자 비영리공간이었다. 돈 없는 신진, 청년 작가들에게 ‘비빌 언덕’임을 자처하며 이 전 대표는 무료 대관과 홍보를 진행했다. 그동안 2천500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고, 이를 찾는 관람객들로 인해 북수동 골목골목 활력이 넘쳤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은 수원시민에게 자부심을 안겨줬지만, 화성행궁 일대 구도심의 슬럼화는 어쩌지 못한 터였다. 대안공간 눈으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움직임은 주변의 모습까지도 바꿔나갔다. 지난 15년간 화성행궁 일대 변화를 이끈 대안공간 눈은 지난 1월 ‘대안공간 눈’이라는 작품의 마무리를 선언했다. 이 전 대표가 자신만의 작품활동에 집중하겠다고 알린 것이다. 대안공간 눈에서 이 전 대표를 만났다.

 

-15년이나 운영하던 공간을 폐관하기로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정말 많은 마을 사람들과 작가들이 안타까워했다. 특히 대안공간 눈에 작품을 전시하려고 준비했다가 뒤늦게 폐관 소식을 들은 젊은 작가들이 굉장히 슬퍼했다. 나 또한 매우 가슴 아팠지만 별다른 외부 지원 없이 사비와 공간에서 창출되는 약간의 카페 수익만으로 공간을 계속 운영해 나가기에는 금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폐관을 결정했을 때 수원시에서도 찾아와 지금이라도 지원책을 마련해줄 테니 문을 닫지 말아달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혔을 뿐더러 성급하게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특혜시비를 만들고 싶지 않아 고사했다. 다만, 다음에 대안공간 눈과 같은 시설이 생겼을 때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두라는 당부는 전달했다."

-자신의 집을 전시장으로 바꿔 운영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사실 대안공간 눈은 남편의 아이디어였다. 남편은 가정형편 상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고등학생 때 미술부 활동을 했을 정도로 예술에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형편이 부족한 예술인들과 공감대가 있었고, 지역 미술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게 제안했다. 그 결과가 대안공간 눈의 탄생이었다. 물론 집을 개조하고 사비로 전시공간을 운영하면서 그나마 갖고 있던 재산을 다 써버려 힘든 순간도 많았다. 정작 우리 가족의 생활 공간이 없어 화실에서 지내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자고 하루하루 독려했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전시공간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가 있다면.
"수원 출신 신봉철 작가가 기억에 남는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였는데 2010년 대안공간 눈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독일 뮌헨미술대로 유학을 가 뮌헨에서 결혼도 하고 지금까지 계속 활동하고 있다. 대안공간 눈에서 전시할 때까지만 해도 좋은 작품임에도 한 점도 팔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건축 관련 작업에 참여할 정도로 잘나간다고 하니 뿌듯하다.(웃음)


또 다른 한 명은 라켈 셈브리라고 하는 브라질 작가다. 그는 2010년 대안공간 눈에서 진행했던 행궁동 벽화마을 활성화 프로젝트 ‘행궁동사람들’ 참여작가로 한국에 왔다. 브라질 사람임에도 한국에 올 때마다 한 달여씩 지내며 주민들과 소통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 동물, 풍경을 벽화로 표현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6년 출산 중 사망하고 그가 그렸던 아름다운 벽화들도 같은 해 개발을 원하는 일부 주민들에 의해 훼손됐다. 다행히 이곳 외벽 한 편에 그의 작품이 남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요즘 대안공간 눈은 어떻게 활용되고 있나.
"일단 대안공간 눈 1· 2전시실은 내 작업실과 대안공간 눈 아카이브실로 바꿨다. 나머지 공간은 기획전시 공간으로 남겨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입주해 운영비, 생활비를 자체적으로 충당하는 일종의 레지던시 공간으로 꾸몄다. 예전처럼 모든 공간을 무료로 대관해주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일부 공간은 돈과 공간이 없는 작가들에게 무료로 빌려주기도 한다.

이외에도 예술공간 봄에서 운영하는 카페는 정상 운영하면서 주민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예술체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는 카페도 들어서고 공방거리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마을도 활성화됐으니 대안공간 눈은 할 만큼 다했다는 생각에 자유로운 공간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는 대안공간 눈을 운영하며 잠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이달 초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조각페어에 개인 부스를 마련해 전시활동을 진행했고, 경기도미술관 전시에도 참가했다."


-조각가로서의 작품관은.
"현장을 발로 뛰고 거기서 겪은 것과 받은 영감을 작품으로 만드는 ‘행동하는 예술’을 하려고 한다. 현재는 30년 전 고등학생 시절부터 뜻이 같은 예술가들끼리 결성한 그룹 ‘슈룹’(우산의 옛말) 차원에서 진행하는 ‘무경계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있다. 서쪽 강화 비무장지대부터 동쪽 강원 고성까지 도보로 답사하며 기록, 채집,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다.

더 예전에는 히말라야, 인도, 네팔 등 여러 나라를 돌며 답사와 작품활동을 병행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에 대해 고민이 있었고, 나를 위한 공간보다 절실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진정한 조각가는 작품만을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공간과 세상을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안공간 눈 설립 구상도 작품관의 연장선상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지난 15년간 대안공간 눈을 운영하면서 가졌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기억들이 사라지기 전에 책으로 녹여내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분명 대안공간 눈에게 행정은 잘해준 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점도 있었다. 행궁동 벽화마을 복원 사업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10년 전부터 요청해 온 인력지원, 세제지원 조례 마련은 끝내 이루지 못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중에 비슷한 공간이 문을 열었을 때 운영자와 행정이 대안공간 눈이 겪은 경험을 반추해 좋은 것은 이어가고 나쁜 것은 반복되지 않게끔 도울 수 있는 책을 엮어보려고 한다. 또 주민과의 관계, 작가들과의 관계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대안공간 눈 운영은 끝났지만 행궁동 벽화를 포함한 마을 활성화 활동은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북수동, 행궁동은 성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지만 여전히 개발이 막혀 그 세계문화유산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좌절이 마을을 떠나게 했고, 일대 슬럼화를 불러왔다. 또 남은 사람들의 울분은 2016년 벽화마을 훼손으로 이어졌다. 개발이 막힌 마을 활성화의 대안으로 예술을 내세우며 15년 전 대안공간 눈을 만들었다.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마을을 예쁘게 조각해나가고 싶다.(웃음)"

취재=황호영기자
사진=김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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