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김구 선생이 남목청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에게 피격

1938년 5월 6일 김구 선생이 중국 창사(長沙)의 조선혁명당 본부 남목청에서 회의를 하던 중, 회의장에 난입한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환에게 피격당하여 중상을 입었다. 이운환의 권총 난사에 제1발에 김구가, 제2발은 현익철이, 제3발은 유동열이, 제4발에 이청천이 맞았다. 김구와 유동열은 중상을 입었고, 이청천은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다.

의사들은 김구가 소생할 가망성이 없다고 보고 응급조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놓아두었다. 장남인 김인과 안공근에게 김구 선생이 사망 소식이 전보를 전해졌다. 그런데 4시간이 지나도 김구 선생이 살아 있자, 그때서야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치료를 받고 김구 선생은 생명을 구하였다. 이운환은 중국 정부에 긴급 체포되었고 공범인 박창세, 강창제 등도 구금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다니던 중국은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고, 이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애국지사들은 중국의 승전이 한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믿고, 항일운동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분열된 한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남목청 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남목청 사건이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 사건으로 알려지다

사건 발생 한 달 뒤인 1938년 6월 15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6인은 남목청 사건에 대해 "범인 이운환이란 자로 말하면 본래 조선혁명당 당원으로서 반동사상을 품고 ... 이 같은 화변을 일으켰"다고 공식 발표하여 이 사건을 이운환 개인의 행동으로 파악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남목청 사건의 배경은 3당의 연합과정에서 ‘소외된 조선혁명당의 강창제, 박창세, 이운환 등이’ 일으킨 사건이며, ‘이 사건은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갈등이 심각하고, 협동전선의 결성이 용이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 24’, 2008)

그런데 김구 암살을 시도한 남목청 사건은 일제가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세력 대결을 이용하여 치밀하게 공작 펼친 결과 발생한 사건임이 최근 밝혀졌다. 2018년 윤대원 교수가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2018)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기밀문서를 분석하여 밝혀낸 것이다.



밀정이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시키다

일제는 독립운동 진영에 많은 밀정을 침투시켜 공작하였으며 남목청 사건도 그 같은 공작의 하나였다. 밀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독립군이 활동했던 만주 및 노령 연해주에 있는 독립운동 진영과 지역 사회에 침투하여 정보를 탐지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왕성한 활동을 펼치자, 일제는 상하이에서의 밀정 활동을 강화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물론이고 외무성, 내무성, 육군, 해군 등의 기관에서 첩보 담당자를 파견하였고, 이들이 밀정을 확보하여 첩보 활동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통역관 1명을 상하이에 주재시켜 임시정부의 정보를 파악하였다. 외무성에서도 상하이 총영사관에 통역관 1명을 파견하였고, 밀정을 다수 고용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육군에서는 2명의 장교, 해군에서 1명의 장교를 파견하여 정보 수집 활동을 벌였다. 상하이에는 일제의 여려 기관에서 파견된 밀정이 활동하였으나, 외무성과 조선총독부가 정보 수집 및 공작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밀정들은 임시정부 외교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정보를 수집하여 일제 첩보기관에 보고하였다. 이들은 우편국이나 부두, 정거장 등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 한국인들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을 이간시켜 분열하게 만들었다.

일제의 밀정 운영에 대해 임시정부도 철저하게 대응하였다. 김구가 이끄는 경무국이 많은 밀정을 탐지하여 처단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김구 암살 음모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경무국의 특무공작 경역량이 축적되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밀정의 암약은 독립운동 진영과 한인 사회에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다. 주변의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밀정으로 단정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일부 독립 운동가들은 자신과 입장이 다른 이들을 일제의 밀정으로 몰아붙이기도 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사를 보면 일인이 파견한 밀정도 많지만, 독립운동단체가 만든 밀정도 적지 않다고 하였다. 무슨 감정만 있어도 ‘그 놈은 밀정이다’고 하여 동지의 명예를 훼손하고, 의견이 조금만 충돌해도 ‘그 자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를 그냥 두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서로 믿음이 없어져 심각한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걱정하여, 사안이 발생하면 임시정부 경무국에 신고하라고 당부하였다.


임시정부와 일제가 첩보전을 펼치다

일제는 1932년 이봉창 및 윤봉길 의거 후 김구 선생을 찾아 체포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를 확충하고 특별고등경찰을 증원하였다. 그리고 김구 선생 암살 공작에 착수하였다.

첫 번째 공작은 1933년 9월 상하이에 파견된 나카노 가츠지(中野勝次)가 한국인 밀정 오대근을 통해 추진하였다. 나카노는 1924년 일본 고등시험 행정과에 합격하고, 1927년 이후 강원도, 함경남도, 경상남도 경무과장을 지냈다. 1933년 9월 조선총독부는 고등시험을 패스한 일본 경찰 핵심 간부를 김구 체포를 위한 공작 책임자로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나카노는 이 방면에 활약해 왔던 임영창을 김구 반대파와 접촉하게 하였다. 밀정 오대근은 1926년 서울의 경성청년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이다.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동지들이 검거되자 상하이로 피신해서, 중국공산당 장쑤성(江蘇省) 법남구 한인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 상하이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인 여운형, 구연흠, 조봉암, 홍남표 등이 잇달아 체포될 무렵 전향하여 일제의 밀정이 된 인물이다.

오대근은 일제로부터 ‘충실한 첩자로서 근무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밀정 일에 충실하였다. 김구가 난징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가노는 1935년 1월 오대근에게 난징에 가서 김구를 암살할 것을 지시하였다. 오대근은 공작원 7명과 함께 난징에 갔으나 김구가 난징에 오지 않아 실패하였다. 그리고 중국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김구는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알고 있었다. "왜구가 나의 종적이 난징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상하이에서 암살대를 파견한다는 보고를 접했다. 공자묘 근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시찰해 보니 과연 사복 일본 경찰 7명이 대오를 지어 순찰하더라"고 ‘백범일지’에서 회상하였다. 오대근은 김구와 중국 관헌의 역공작에 말려들어 난징에서 체포되고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임시정부와 일제 사이에 치열한 공작전이 펼쳐졌으며, 이 공작 전에서 임정이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밀정 이영창을 내세운 두 번째 김구 선생 암살 시도 실패

1935년 2월 새로운 공작 책임자로 조선총독부 히토스키 토우헤이(一杉藤平) 사무관이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그는 김구에 반감을 가진 의열단과 신한독립당 소속 청년을 매수하거나,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서 소외된 세력의 내분을 이용할 생각을 하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최종적으로 김구, 안공근과 친밀한 관계를 가진 한국인 무정부주의자를 이용하기로 하고 공작에 착수하였다. 히토스키가 선택한 킬러는 밀정 임영창이었다.

임영창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1928년 상하이 영국조계에서 연태양행 지배인을 협박하여 10만원을 강탈하려다가 체포되어 일본 총영사관에 인도되었다. 이 때 약점이 잡혀 밀정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0월 하순에 시도한 김구 암살 계획도 실패로 끝났다. 임영창이 난징으로 갔으나 김구를 찾지 못한 것이다. 공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김구 암살에 협력하는 듯하였고, 공작금 300원도 히토스키로부터 받아냈다. 공작 책임자인 히데스키는 공작이 실패한 원인을 무정부주의자의 역공작에 말려들었기 때문으로 판단하였다. 김구에 대한 두 번째 암살 공작도 역공작을 당한 일제 측의 패배로 끝이 났다.


남목청 사건의 진실, 내부 분열이 아니라 일제의 공작이었다

남목청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김구는 이운환이 강창제와 박창세 양인의 사주를 받아 저지른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조선민족전선연맹도 "박창세, 강창제의 사주에 의해서 이운환이 김구 등을 저격"한 것으로 보았다.

김구 암살 공작 책임자인 히토스키의 1935년 8월 29일 ‘상하이일본총영사관 경찰부의 특종공작’ 문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지 총영사관 경찰부에서는 종래 ‘헤로인’ 밀매 관계로 출입하고 있는 박제도를 통해 부친 박창세를 회유하고 동인(박창세)의 손에 의해 김구를 처치하려고 획책 중이다. 그리고 박창세는 소화 8년 이래 김구 일당에 가맹했고 그 후 김구의 특무대장이 되어 활약함으로써 김구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고 또 실행을 위한 이런 공작에는 진실로 적당한 인물이다....동인(박창세)의 차남 박제건(은)...형 박제도와 함께 조선에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음으로 총영사관과 협력하여 동인 등의 조선 귀국에 편의를 주고 박창세 회유의 방법으로 삼으려고 협의 중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불령운동에 매진해 왔던 박창세가 곧바로 전향하여 생각 있는 김구를 장례하려는 이런 공작을 담당하려고 할지는 의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이 작성된 1935년에는 박창세가 히토스키의 공작에 동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토스키는 박창세 가족을 이용하였다. 1936년 4월 3일 권투선수인 박창세의 작은 아들 박제건이 ‘상승의 권투왕’이 되어 형 박제도와 함께 일제 식민지 하 조선으로 금의환향하였다.

윤대원 교수는 이 무렵 밀정이 된 박창세가 이운환을 김구 암살에 동원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일제가 박창세 아들의 귀국 문제로 박창세를 회유하였고, 밀정이 된 박창세가 김구에 불만을 가진 이운환을 사주하여 김구 암살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남목청 사건 후 박창세가 상하이로 피신한 뒤 중국 주둔 파견 총사령부에 근무한 것도 이같은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밀정의 탄생

일제강점기 밀정 중 많은 이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낙오하거나, 개인적 약점 등이 원인이 되어 밀정이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독립운동 내부 진영의 분열을 획책하는 비열한 공작을 펼쳤다. 밀정은 친일파 중에서 죄질이 가장 나쁜 경우에 속한다. 최근 KBS가 8개월의 탐사 끝에 ‘시사기획 창-밀정 2부작’에서 약 5만 건의 자료를 분석하여 밀정 혐의자 895명을 확인하였다. 이 중에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현충원에 안장된 이도 있다고 한다. 밀정과 관련되어 잘못 쓰인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윤대원 교수의 ‘일제의 김구 암살 공작과 밀정’(한국독립운동사연구 61, 2018), 김광재 교수의 ‘상해시기 옥관빈 밀정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한국근현사연구 63, 201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 24’(2008)에서 도움받은 바 크다.

강진갑(경기학회장,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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