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1995년 4월 30일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베이징에서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다. 무려 4반세기가 지난 25년 전이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똑같이 한다고 해도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니 한 등급 더 낮추어 ‘정치는 5류, 행정은 4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듯싶다. 그로부터 25년이 지금 대한민국은 비록 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크게 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20위권 안에 위치하고 있고, 방탄소년단이나 봉준호 감독 같은 문화 상품들의 위력도 대단하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초기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 성장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이다.

양지가 밝을수록 이에 가려진 음지도 그만큼 깊어지는 법. 외형 성장 그늘에 가려진 빈부격차, 세대 간 갈등, 비인간적 범죄들도 성장에 비례해 늘어나고 있다. 특히 정치는 백약이 무효인 중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 그나마 경제성장이라는 외피로 국민들이 덮어주기 때문에 그나마 명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 1년간 한국사회를 통째로 말아먹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공수처, 패스트 트랙, 조국사태 같은 일들이 진정 국민들을 염두에 두고 벌어진 것들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분명 정치는 한국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weakest link)임에 틀림없다. 약한 고리는 위기 시에 그 민낯을 드러내는 법이다. 평소 기관지가 약한 사람은 목으로 소화기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복통이나 설사로 감기증세가 시작된다. 지금 세계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19라는 미증유의 위기상황은 맞고 있다. 하지만 그 양상을 나라마다 크게 다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코로나 사태가 각 나라의 약한 고리를 드러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의 엽기적 섭생문화나 폐쇄적 사회주의 국가통제시스템, 이탈리아의 국력에 걸맞지 않은 열악한 의료체계, 바이러스 확산 위험성이 높은 종교국가처럼 각 나라들의 약한 고리들이 속속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마스크조차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어 한국에게 SOS를 치는 미국의 모습은 민낯의 백미를 보여준다. 허풍쟁이 트럼프가 우리에게 구걸을 하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다. 구글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를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미국이 초보수준의 2차산업이 완전히 붕괴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이런 저런 정치적 이유로 중국으로부터의 바이러스 차단을 초기에 봉쇄하지 못해 가장 먼저 코로나19 창궐국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세계 최첨단 의료기술과 시스템, 의료인들의 소명의식 그리고 그 흔한 사재기조차 보이지 않았던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직 불투명하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섣부른 것 같지만 많은 나라들이 대한민국의 위기대응 능력에 감탄하고 또 경의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나라의 약한 고리는 역시 정치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4류 아니 5류라 고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사사건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정치권은 여·야를 불문하고 5류 임에 틀림없다. 입국폐쇄조치, 신천지 연루설, 특정 지역명칭, 공적 마스크 공급 등 사사건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볼썽사나운 싸움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또 조기종식 될 거라고 마스크 공급에는 지장이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인 대통령과 자화자찬하기 바쁜 무능한 정부부처관료들도 4류, 5류이기는 마찬가지다.

약한 고리 정치권의 하이라이트는 4월 총선에 대비한 위성비례정당 추태다. 물론 위성비례정당은 현 정부와 여권이 일방적으로 졸속 처리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위성비례정당을 처음 만든 것은 야당이지만 궁극적 책임은 공수처법 처리에 매몰되어 말도 안되는 선거법을 밀어부친 대통령과 여당에게 있다. 더욱이 자신들도 그토록 비판해왔던 위성비례정당을 만들고, 여·야를 막론하고 비례대표 추천과정에서 잡음이 끊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 정치가 이건희 회장이 4류라고 했던 25년 전보다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흔히 경제는 순환곡선을 그린다고 하는데 지난 30년만 보면 우리 정치는 하향곡선만 그려온 것이 분명하다. 우리 정치가 바닥을 치고 상향곡선을 그릴 때는 언제쯤일까? 혹시 그럴 때가 앞으로 상당기간 오지 않는 장기파동곡선 밑바닥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된다.

황근 선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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