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눈에 사랑에 빠진 조나단(존 쿠삭 분)은 사라(케이트 베킨세일 분)에게 전화번호를 묻는다. 운명적인 사랑의 환상을 가진 사라는 연락처를 주는 대신 운명에 맡길 것을 제안한다. 고서적에 자신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후 헌책방에 판 뒤 조나단에게 그 책을 찾으라고 한다. 더구나 사라는 조나단의 연락처가 적힌 5달러 지폐로 솜사탕을 사 먹고는 그 돈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면 연락하겠다고 말한다. 이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던 조나단과 사라는 7년 전 뉴욕에서의 만남을 잊지 못하고…

영화 ‘세렌디피티(피터 첼솜 연출)’의 도입부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지만 운명적 사랑의 환상을 그린 영화로는 손색이 없다. 중년의 필자 역시 운명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은 걸까. 난데없이 영화 ‘세렌디피티’가 떠올랐다. 전혀 다른 이유에서. 영화에서 사라가 헌책방에 맡긴 책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이즈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와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는 책이다. 이유는 불문가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콜레라 감염병이 대유행했다. 이른바 콜레라 시대다. 클래식의 거장 차이코프스키 역시 콜레라 시대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1893년 ‘비창’을 초연하고 9일 후 사망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망원인을 두고 지금껏 뒷말은 무성하지만, 당시 공식적인 사망원인은 콜레라 감염이었다.

남미 문학의 거장 마르케스는 노벨문학상 수상 후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발표했다. 소설은 19세기 말 콜롬비아 카리브해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세월의 흐름과 죽음, 질병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을 그리고 있다. 부유한 상인의 딸인 페르미나를 사랑하지만 환경과 어긋난 상황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가난한 청년 플로렌티노. 그는 수많은 여인과 세속적인 사랑을 나누며 자신이 페르미나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다시 그녀와 조우하면서 확신을 잃는다. 그때부터 그는 언젠가 페르미나가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믿고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돈과 명예를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페르미나의 남편 우르비노 박사의 장례식 때,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려온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작품은 질병과 늙음과 계급을 뛰어넘는 운명적인 사랑의 연대기를 그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식민시대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까지, 이른바 콜레라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야 했던 아메리카인들의 지난한 삶의 몸부림이 응축돼 있다.

2020년, 연초부터 불어닥친 코로나19 감염병 열풍이 거세다. 후세인들은 이 시기를 일러 ‘코로나 시대’라 부르게 될 것이다. 코로나 시대의 한중간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세계인의 몸과 마음이 무겁고 버겁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마음의 혼란과 공포심이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을 덮치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팬데믹, 인포데믹, 코호트 격리 등 듣도보도 못했던 희한한 용어들이 활개를 친다.

와중에 사랑 타령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미 문학의 거장 마르케스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이야기했듯이 이제 우리도 ‘코로나 시대의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희망은 사람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지난달 14일 부산의 한 파출소 앞에 뭔가를 떨구고 홀연히 사라지는 청년의 모습이 CCTV에 담겨 뉴스를 탔다. 남자가 두고 간 건 11장의 마스크와 사탕, 그리고 손편지였다. 거기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부자들만 하는 게 기부라고 생각했는데 뉴스를 보니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용기를 내서 줍니다. 너무 작아서 죄송합니다. 위험할 때 가장 먼저 와주시고 하는 모습이 멋있고 자랑스럽습니다."

정작 막아야 할 건 바이러스지만 사람들은 엉뚱하게도 국경을 막는다. 부득불 사회적 거리두기를 이야기하는 와중에 정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 마음의 거리를 둔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19 감염증 대응에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 등을 꼽는다. 이들 국가는 광범위한 테스트, 투명한 정보 공개, 정보력 있는 시민들의 참여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다. 요는 ‘국수주의적 고립’을 선택할 것이냐 ‘글로벌 연대’를 구축할 것이냐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은 물리적 거리는 두되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최준영 거리의 인문학자, ‘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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