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사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고령산에 있는 절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현재 보광사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대웅전에 있는 숭정칠년명범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에 새겨져 있는 조성문의 내용을 통해 사찰의 역사나 위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듣건대 이 절은 고려 때 도선국사께서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지으셨다 한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 명나라 만력 20년(1592)의 병화에 전소되어 사슴의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30년이 지난 임술년(1621)에 해서지방의 스님 설미와 호서지방의 스님 덕인이 비로소 이 터에 들러 우연히 탄식하여 말했다. ‘유명 사찰이 빈 터로 남아 있으니 복구하지 않을 수 없구나.’ 설미스님은 법당을, 덕인스님은 승당을 지었다.

이로써 사해의 현사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갖가지 도구도 예전에 못지않게 구비했으나 종 하나가 없어 흠이었다. 덕인스님이 이를 애석하게 여겨 생각하던 끝에 숭정 신미년(1631)에 도원 노승을 화주로 추대하니, 3년 동안 애써서 청동 30근을 모으고 중도에서 물러갔다.

지금의 화주 신관은 해서지방 스님인데 주지 학령의 추천을 받아 도원의 뒤를 맡은 분이다. 이때 절의 대중 20명이 힘을 다해 도왔고 별좌 지승은 덕인스님의 제자인데 덕인스님의 본을 받아 정성을 다하기 조금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위의 기록은 1634년에 봉안된 범종 표면에 있는 명문이다. 이에 의하면 보광사는 894년(진성여왕 8) 도선스님이 비보사찰로 창건하였으며, 그 뒤 1592년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것을 1622년 설미와 덕인스님이 중건했다고 한다. 범종불사는 덕인스님이 1634년 시작하여 그의 제자 도원을 거쳐 신관스님이 마쳤다는 이야기이다. 이 명문은 보광사의 창건과 조선 중기의 연혁을 알려주고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 외 후대의 몇 몇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 1215년(고종 2)에는 원진(元眞)스님이 중창하였고, 1388년(우왕 14)에는 무학(無學)대사가 중창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보광사는 조선후기에 사격(寺格)과 관련해 매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740년(영조 16)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 임금을 낳은 숙빈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의 원찰이 되는 것이다. 전북 태인에서 태어난 숙빈최씨는 어릴 때 역병으로 가족을 잃고 친척 집에 얹혀살다가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 민씨를 따라 궁궐로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청소 따위를 하는 무수리로 지냈으나 후궁의 위치까지 올랐고, 25세에는 연잉군 이금(영조)을 낳았다. 그러나 숙빈최씨는 궁궐에 사는 동안 이러저러한 정쟁에 시달려야 했고 왕의 어머니가 된 후에도 후궁에 머물러야 했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를 향한 영조의 효심이 지극해서인지 소령원에 친필 비문을 새겼으며, 모친의 혼을 보광사에 모셔 극락왕생을 빌었다. 지금도 사찰 경내에는 숙빈최씨의 위패가 봉안된 어실각이 있으며, 그 앞에는 어실각을 지을 때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있다.

보광사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원통전·응진전·지장전·어실각·산신각·만세루·승당·범종각·별당·수구암 등 여러 채의 전각이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으나, 대웅전과 만세루 정도가 숙빈최씨의 원찰이 되었을 때 중건 또는 창건된 건물이다.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성된 비교적 큰 규모의 전각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금의 전각은 1740년(영조 16)에 새로 중건된 것이다. 대웅보전 현판은 영조대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외벽이 흙벽이 아닌 나무판벽으로 되어있으며, 그 판벽 가득히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벽화들은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쪽 벽면에는 연화화생도와 반야용선도 등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특히 연꽃이 핀 못의 풍경을 묘사한 장면은 구성도 아기자기하고 불보살님도 볼 살이 통통한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서 보광사 벽화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연화대좌에 앉으신 부처님의 머리 위에는 천개와 함께 팔보 장식이 바람에 날리고 그 주위로 극락조와 극락의 보궁을 표현한 듯 전각의 지붕도 연못 풍경 위에 함께 있다. 이 모티프들을 다 조합해 보면 이 벽화는 선업을 지은 인연에 따라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연화화생하는 형상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연화화생도 옆의 반야용선도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극락정토로 향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왕생하는 사람들 없이 다섯 분의 불보살만 보이는데, 뱃머리에는 길잡이의 왕인 인로왕보살이, 배꼬리에는 지장보살, 그리고 휘장을 두른 배의 중간에는 아미타삼존불이 계신다. 중생들은 이 배를 타고 서방정토로 가게 된다. 용선의 용은 입을 크게 벌리고 바다를 가르며 가고 있는 것 같은 운동감을 주기 위해 얼굴부분의 털을 휘날리게 표현하였다. 대부분 반야용선도에는 많은 군중이 함께 타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나 이 벽화에는 군중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 화면의 하단부가 박락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남쪽 벽면에는 불법의 진리를 수호하는 위태천 벽화와 사자 탄 문수동자도가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는 동자가 흰꼬끼리를 몰고가는 장면과 백의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대웅전 안에는 현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2구의 협시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삼불좌상과 두 구의 협시보살은 양식이나 기법 면에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중 좌협시 보살상의 복장에서 조성 발원문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보살상은 경기도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미륵 보살상으로, 보살상의 조성에는 영색(英?)을 비롯한 5명의 승려 조각승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좌협시 보살상이 미륵보살상인 것으로 볼 때, 우협시 보살상은 제화갈라보살상이며, 이 보살상들은 양주 회암사가 폐사된 후에 파주 보광사 대웅전으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보살상들은 발원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연대, 제작자, 존상 명칭 등이 밝혀져 있어 17세기 전반기 불교 조각 연구에 기준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범종각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는 숭정칠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鐘)의 모조품이 걸려있고, 실물은 대웅전 안에 있다. 이 종은 전체 높이 98.5cm의 중간 크기 종으로서 입체감과 안정감이 있으며, 조선 후기 범종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 종의 몸통에는 보광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 가득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효의 사찰이라면 효행박물관이 있는 화성 용주사를 떠올릴 수 있다. 용주사는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1752~1800, 재위:1776~1800년)가 부친 사도세자(1735~1762)의 명복을 빌어주고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관리하고자 1790년에 건립한 능사(陵寺)이다. 하지만 정조의 효심은 선왕이었던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이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최씨를 위해 추복도량으로써 파주 보광사를 지정했고 경내에 어실각을 건립하였으며, 친히 향나무를 심었다. 이후 파주 보광사는 국가와 왕실의 주목을 받아 대원군, 고종과 민비 등의 왕실원당이 될 수 있었다.


글·사진 =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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