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를 고스란히 살았던 초절주의 작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은 사과(謝過)의 언어가 결핍된 유감의 사회로부터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났다. 하버드 대학 출신의 목사로 지역 교회를 담당하고 있을 당시, 그는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던 청교도 지도자들과 일부 신자들의 종교적 독단, 그리고 그들의 정직하지 못한 처신에 크게 실망했다. 그는 자주 그들의 행태를 지적했고, 때로는 따갑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비난과 배제라는 현실로 그에게 되돌아왔다. 그의 따뜻한 충고에 대하여 종교적 형식주의에 깊이 물든 사람들은 사과는커녕 자신들의 위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 바빴던 것이다. 결국 그는 목사직을 내려놓고 죽는 날까지 시대유감(時代遺憾)을 스스로 떠안은 채 자신을 포용과 환대로 맞이해 줄 세상을 향해 나섰다. 그는 평생 내면의 정직함을 위하여 분투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삶과 글로 자신을 거부한 세상에 응답했다.

성서의 창세기는 죄의 기원과 최초의 형제 살인이야기를 다룬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구체적인 변명뿐이었다. 아담은 이브에게, 이브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최초의 형제 살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야기다. 카인은 동생 아벨의 예배만 받아 주고 자신의 예배를 거절한 하나님에 대한 저항적 분노를 동생 살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카인은 대답하기를 ‘제가 동생의 보호자입니까’라고 반문하며 형제에 대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카인은 사태의 근원을 진정성 있게 파악하려는 숙고적 사유를 포기한 채 계산적 사고로만 자기 옹호를 했다. 그는 사태 발생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고, 카인은 평생 세상을 방랑하는 인생이 되었다고 말한다. 사과의 결핍이 인간의 삶에 짐이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사과’는 ‘잘못 따위를 스스로 인정하고 용서를 빌다’라는 사전적 뜻을 가지고 있다. 사과의 의미에는 진정성뿐만 아니라 속도를 포함한다. 실제로 몇 년 전, 유명 배우 한 사람이 논문 표절 문제로 사회적으로 큰 비판에 직면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았고,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사과와 함께 학위를 반납했다. 이후, 그는 대중의 주목받을 만한 어떤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를 향했던 대중들의 비판과 질책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결국 그의 용기 있는 재빠른 사과와 진정성 있는 자숙의 모습에 팬들까지도 그를 용서했다고 매체들이 기사로 전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존재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고유한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를 구체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존재론적 힘이 인간을 근본 기분으로 편입시키는 경이로움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과라는 격조 있는 변명은 말하는 사람의 선택과 행동에서 강력한 주체성을 담보한다. 어떤 면에서 사과에 담긴 진정성이야말로 충분히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사과를 기대하는 상대방의 이기심을 역설적으로 강화시켜주니까 말이다. 그때 비로소 상대방과 강력한 유대가 회복될 수 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온종일 유감과 사과의 언어가 충일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화자의 발화에 대하여 격조가 담긴 진정성을 기대한다. 유권자들은 진정성 있는 사과의 언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마음과 귀를 기꺼이 내어준다는 뜻이다. 비록 완벽하지 못해도, 정직과 격을 갖춘 진심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쿨하게 사과하라!"라는 책에서 정재승은 리더의 위기관리 언어가 곧 ‘사과’라고 일갈하지 않았나. 모든 것이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이 눈앞이다. 그렇잖아도 바이러스 사태가 가져온 우울한 현실인데, 그중에 우리의 가난해진 마음을 넉넉하게 해줄 기품 있는 말 한마디가 무척 그립다.

차종관 목사(세움교회/성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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