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사진=블로그 ‘역사는 거울이다’
충무공 이순신. 사진=블로그 ‘역사는 거울이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신은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왜적이 신을 아직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 하면 아마도 이 말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는 이순신이 리더로서 탁월한 전략을 보여준, ‘명량해전’을 앞두고 한 말이다.

당시 육지의 전황은 조·명 연합군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남아 있는 조선 수군의 병선은 12척뿐. 이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권율의 육지전에 합류하도록 하는데, 이때 이순신이 한 말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손꼽힌다. 특히 우리나라가 위기상황에 처해 있을 때마다 역사적 모범 인물로 거론되고 있으나, 어쩐지 그에 관한 제대로 된 기념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충무공 종가댁 17위.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제공
충무공 종가댁 17위.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제공

◇조선 중기의 명장, 이순신은 어떤 사람인가?=이순신은 북방에선 여진족의 침입으로부터, 남쪽에서는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바탕에는 백성과 맡은 바 직무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이 자리잡고 있었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전쟁이 터지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다. 자신보다는 늘 백성들의 일상과 안위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했다. 그가 2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기적 같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덕수이씨 시제 산신제.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제공
덕수이씨 시제 산신제.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제공

이순신은 성공을 앞에 두고도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자력이 아니면 취하지 않은 인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순신의 최초 공직생활은 32세 때인 1576년 2월 식년무과(式年武科)에 합격하면서부터다. 장수로서 필요한 무예는 물론 학문에서도 워낙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9품으로 임명된 그가 처음으로 맡은 주 업무는 인사 청탁이 많이 들어오는, 군사들의 인사업무였다고 한다. 한 번은 상관인 병부 정랑(兵符 正郞, 정5품)이 거의 명령과도 같은 청탁을 했는데, 이에 "순서가 되지 않은 아랫사람을 승진시키면 그 자리에 승진할 사람이 못하게 되니 이 일은 옳지 못하다"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해군사관학교 건조한 거북선. 사진=덕수이씨대종회 홈페이지.
해군사관학교 건조한 거북선. 사진=덕수이씨대종회 홈페이지.

이후 여러 가지 위압과 모략, 보복성 인사가 잇따랐고 결국 파직을 당하게 되지만, 이순신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저 불의함과 부정함에 취해 있는 자들이 스스로 반성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할뿐 원한을 품지 않았다.

또한 이조판서로 있는 이율곡이 19촌 조카뻘인데다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 억울한 파직에 대한 문제를 하소연하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나와 율곡은 친척이기에 만나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은 만나는 것이 옳지 못하다"라면서 끝내 만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파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3년 전 근무한 계급으로 강등해 복직된다.
 

덕수이씨대종회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예를 다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덕수이씨대종회
덕수이씨대종회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예를 다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이순신 장군의 정신... 후손들의 기억속 다시금 꽃 피우길=이순신의 그러한 삶은 결국 조선의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따라서 그의 리더십이 ▶전쟁에 대한 위기 감지 능력 ▶위기 대응 전략 ▶객관적인 인사원칙 등으로 분류돼 주목받고 있다.

첫 번째 ‘위기 감지 능력’의 경우 임진왜란 전 준비기, 강화교섭기, 정유재란기의 기간을 통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고 분석된다. 거북선 건조와 무기체계는 물론 병력 확보에 최선을 다했고, 군량 조달을 위한 둔전을 경영하거나 어염을 통해 군량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활쏘기, 함대의 진형 형성을 위한 해상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은 당연하다.

충무공손 이두영화백(초대디지탈아트협회 회장)의 작품. 사진=덕수이씨대종회 홈페이지.
충무공손 이두영화백(초대디지탈아트협회 회장)의 작품. 사진=덕수이씨대종회 홈페이지.

두 번째 ‘위기 대응 전략’의 구현을 들 수 있다. 간첩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점, 중간 귀착지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 해상 상태가 불리한 점 등이 판단 근거가 됐으며, 칠천량해전의 출전을 거부한 이유가 된 것이다.

끝으로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면서도 부하들의 공적에 대해서는 상세하고 정확하게 처리, ‘객관적인 인사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임진왜란 기간 중 96일에 걸쳐 123건이나 되는 처벌을 내렸는가 하면 공적이 탁월한 경우에는 반드시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 까닭이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 상황에 ‘사랑과 정성, 정의와 자력’이라는 가치를 잘 담아 실천해 낸 이순신 장군의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기억속에 되살리고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덕수이씨대종회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예를 다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덕수이씨대종회
덕수이씨대종회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예를 다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사진=덕수이씨대종회

지난달 2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에서 참배하고 방명록에 남긴 다음의 글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듯하다. 윤 후보는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백성만 생각하신 충무공의 헌신과 위업을 받들어 위기의 나라를 바로 세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한편,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고 선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덕수이씨대종회의 노력도 남다른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순신 장군의 不世出(불세출) 리더십의 배경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고귀한 가풍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우리 후대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강경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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