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 중요시되는 시대에 공감 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공감은 남의 주장이나 감정 혹은 생각에 찬성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empathy)이나 동정(sympathy)을 넘어 ‘컴패션(compassion)’을 말하기도 한다. 컴패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일처럼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덜어주는 태도를 의미한다. 컴패션을 자비(慈悲)라고도 할 수 있는데, 컴패션의 의미를 지닌 자비는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며, 철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주목받아 왔다. 자비를 인류의 공통된 보편적 가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성경(Bible)에서도 자비는 핵심 개념이다. 구약성경은 이집트 노예살이를 겪으며 고통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몸소 땅에 내려와 구원해주시는 자비로운 하느님을 전한다. 신약성경의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으로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병든 이들의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하시어, 그들의 병고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고 구원하신 자비 가득한 분으로 제시된다.

컴패션의 의미를 지닌 자비는 종교뿐 아니라 모든 이가 일상에서 공통으로 체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남의 불쌍한 처지를 자신의 것처럼 여기며 함께 아파하고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행위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태생적인 것이다. 한국 문화에서도 그와 관련된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은 특히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다. ‘단장지애’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하는데, 성경의 ‘자비’라는 단어의 어원과 매우 가깝다. ‘애끓는 마음’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남을 향해 갖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고통을 나의 것처럼 함께 겪는 마음은 교육을 통해서도 얻어지지만, 태생적으로 주어진 인간 본연의 마음일 것이다. ‘미개’와 대응되는 ‘문명’이 진정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면, 진정한 문명은 태어나면서 갖는 자비심을 북돋아주며, 사회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더욱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행동과 제도로 옮기는 문명일 것이다. 세상에는 재산, 능력, 신체적 조건 등에서 늘 불평등이 존재하기에, 더욱 인간적인 세상을 위해서는 그러한 불평등이 사라지도록 하거나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 진정한 사회 발전이라 하겠다.

마태오 복음 25장에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특이한 점은 심판의 기준이 얼마나 열심히 종교 생활을 했느냐가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어떻게 했느냐이다. 이 이야기를 믿고 말고는 각자의 자유에 맡겨진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떠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될 것이란 사실이다. 삶의 질이란 건강하고 부유하게 여가를 즐기며 안정된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자신 안에 갇히지 않고 얼마나 타인에게 개방되어 있느냐,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얼마나 삶을 나누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컴패션, 자비가 우리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각자의 삶뿐 아니라 사회를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짧으면 짧고 길면 길 이승의 생을 잘 살아 마지막 날에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잘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으려면, 주위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에 마음일 기울이고 그들 편이 되어 이 세상이 보다 인간다운 세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자비의 문화’를 만드는 이 길에서 종교와 정치는 더욱 큰 책임이 있음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