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전경
남한산성 전경

◇가봐야 별로 볼 것도 없다?
‘경기도의 전통사찰’이란 주제로 기고문 작성 제안을 받았을 때, 약간은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뭇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통사찰의 이미지에 과연 경기도에 남아있는 전통사찰들이 부합할지 의문이었다. 이 가운데 필자가 배정받은 주제인 ‘남한산성의 전통사찰’에는 여주 신륵사나 안성 칠장사와 같은 유구함을 지닌 곳도 없었다.

‘한국사지총람(韓國寺地總覽)’(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2021)에 따르면 전국에서 현재까지 보고된 사지는 5천738개소이며, 그 중 경기도는 539개소로서 10%가 채 안된다. 경상도가 약 1천800개소, 충청도가 약 1천300개소이므로 이에 비하면 경기도의 사지 규모는 다소 빈약한 편이다. 규모뿐만이 아니라 사찰 주변의 경관까지도 문화재의 일부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경기도의 사찰 대부분은 지방에 위치한 고찰(古刹)들의 주변 경관에 비할 바는 못 될 것이다.

남한산성의 전통사찰을 소개함에 앞서 이 같은 딴소리를 한 배경에는 독자의 기대치를 낮추기 위한 필자의 음흉한(?) 의도가 깔려있다. 실제 남한산성의 전통사찰들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이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고찰들과 달리, 남한산성 사찰들의 건물들은 심심하고 그 규모도 크지 않으며, 대부분은 그 터만 남아있는 형편이다. 또한 입지가 성내 외곽에 위치하여 갑갑하기만 하다. 하지만…

 

남한산성 사찰 위치도
남한산성 사찰 위치도

◇왜 절이 산성 안에 있는걸까?
‘가봐야 별로 볼 것도 없다’는 이 실망감의 기저에 사실은 남한산성 전통사찰 나름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소위 전통사찰에 볼 거리가 많은 이유는 ‘가람(伽藍) 배치’ 때문이다. 옛 건물들이 양호하게 남아있는 사찰들을 방문하면 대개 ‘당간지주-일주문-사천왕문-탑-금당’의 차례로 시설물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이 같은 사찰의 건물 배치를 가람 배치라 한다. 가람 배치는 시대와 지역마다 양상이 조금씩 다른데, 예컨대 고구려·신라의 경우 일탑삼금당(一塔三金堂), 백제는 일탑일금당(一塔一金堂) 양식이 유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당시의 가람 배치는 불교의 융성을 목적으로 가람 배치가 능동적으로 이뤄진 반면, 남한산성의 사찰들은 가람 배치가 당시의 형편에 맞게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일까? 정답은 남한산성의 전통사찰들이 보통의 사찰들과 달리 ‘산성(山城)’ 안에 위치한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산성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자 공간으로서, 이 긴장감 넘치는 공간에 종교시설이 자리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부자연스러운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남한산성의 사찰들이 모두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기 때문이다. 승영사찰이란 승군(僧軍)이 거처할 목적으로 지어진 사찰을 말한다.

 

망월사
망월사

◇10개의 사찰
학계에서는 남한산성의 초축(初築) 시기를 신라 문무왕대 축성한 주장성(晝長城)과 연관 짓고 있지만,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남한산성의 모습은 인조 2년(1624)에 승군들을 동원하여 축성한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조선의 ‘숭유억불’ 기조 아래서도 불교의 명맥이 암암리에 이어져 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초기부터 승려들은 역군으로 동원됐는데 현종대에 승군들이 숙련된 축성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 조정은 표면적으로 억불정책을 유지하면서도 필요시에는 승려들의 노동력을 착취대상으로써 이용했던 듯 하다. 이것이 양면적이고 가혹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슬람권에서도 타종교를 숭상하는 피지배인들로부터 ‘지즈야’라는 종교세를 징수했었고, 인류 역사에서 정부가 국가의 통치이념에 위반하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경제력과 노동력을 착취한 사례들은 꽤나 흔했다.

아무튼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의 축성과 유지보수, 군사훈련에 승군들을 동원하였고 자연스럽게 승군들이 거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 지금의 남한산성 전통사찰들이다. 남한산성의 승영사찰들은 옥정사(玉井寺), 망월사(望月寺), 장경사(長慶寺), 국청사(國淸寺), 개원사(開元寺), 한흥사(漢興寺), 남단사(南壇寺), 천주사(天柱寺), 동림사(東林寺), 영원사(靈源寺)까지 총 10개소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인조24년(1646)에 7사(七寺), 숙종20년(1694)에 9사(九寺)가 있었다고 하며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영원사까지 총 10개의 절이 있다는 언급이 있다.

효종7년(1656) 기록에는 승군의 출신지에 따라 거주하는 사찰이 서로 달랐다는 기록이 있다. 전라도 승군은 천주사, 경상도 승군은 한흥사, 충청도 승군은 장경사, 강원도 승군은 국청사, 경기도 승군은 망월사, 황해도 승군은 옥정사에 거주하였다 전해지며, 개원사가 승군 본영이었다고 한다. 현종은 남한산성 사찰들의 규모에 대해서 묻기도 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승정원일기’에는 사찰들의 현황과 사찰 운영의 어려움 등의 내용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 남한산성 승영사찰들이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 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장경사
장경사

◇볼 것도 없었던 이유
이 가운데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는 일부 건물들을 복원하여 현재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국청사, 한흥사는 그 터가 발굴조사된 바 있으며, 나머지 사찰들은 모두 폐사지로 남아있다. 장경사의 경우 나머지 사찰들에 비하면 옛 모습이 잘 남아있는 편인데 건축물들의 간격이 오밀조밀하고 마당이 협소하여 앞서 언급한대로 창건배경을 모르고 방문한 사람들 눈에는 전통사찰이 맞는지 의문이 들 것이다.

장경사와 같은 가람 배치를 학계에서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型)’ 가람 배치라 하는데, 조선시대에 좁은 산지에 창건된 사찰들의 모습이 대개 이러하다. 더욱이 이 곳 사찰들은 승영사찰이다 보니 이 곳에 거처하는 승군들은 유사시에는 전시에 동원되는 한편 상시적으로 산성의 보수와 관리를 맡아야 했기 때문에 사찰들의 위치는 모두 성내 평탄지가 아닌 외곽에 위치하여 사찰들의 입지가 대부분 험하다. 또한 각각의 사찰들이 남한산성 외곽 곳곳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각 사찰마다 관리하는 성곽 구역이 정해져 있던 듯 하다. 망월사의 경우 산 중턱의 능선 사이 계곡을 메운 대지 위에 위치하여 입지가 꽤나 가파른데, 통상 전통사찰들을 방문할 때의 운치를 기대하고 방문한다면 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지금도 오르기 힘든 그 길을 하물며 옛날엔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듯 좁은 산지에 사찰을 짓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축물들의 배치는 산세의 형편에 맞게 지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승영사찰은 불교 건축물들만 존재했던 곳이 아니다. 국청사지와 한흥사지의 발굴조사 결과 무기고와 창고 부지가 확인되었다고 하니, 근래에 운영 중인 남한산성의 전통사찰들이 전형적인 가람 배치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다 하여 이를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영화 ‘남한산성(2017)’의 초반부에 김상헌(김윤석 분)은 자신에게 지름길을 알려준 어느 노인을 죽인다. 그가 청군에게도 그 지름길을 알려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영화의 전면부는 주전론과 주화론의 가치 대결로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 노인의 죽음에 대한 여운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기고문을 쓰며 영화 속 노인의 죽음이 오버랩되는 것은 왜일까? 그 시기 승군들이 시대의 요구(?)에 떠밀려 전장과 토목공사 현장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이용당하면서도 그들의 희생이 오늘날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마치 그 노인의 죽음과 어쩐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억불사상 탓에 불교계의 처지가 열악했으므로 어쩌면 승군체제에 속했던 승려들은 다른 승려들에 비해 형편이 비교적 나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당시 남한산성 사찰들에 승려들이 파견되지 않아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남한산성에 거주하는 승려들의 고단함이 꽤나 컸을 것으로 짐작해 볼 뿐이다.

남한산성 벚꽃의 개화는 늦기로 유명하다. 달리 말하면 이 곳의 겨울이 그만큼 길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겨울의 이 곳은 유난히 다른 곳 보다 추웠다. 과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이 전쟁터는 이제 시민들에게 여가생활을 제공해주는 공간으로 변모하며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고, 성내 한복판에 위치한 행궁과 등산로를 따라 위치하는 성벽구간은 소위 이곳 남한산성의 ‘인싸’가 되었다. 이것과 대조되어 여기 터전을 만들었던 당시 승군들의 숨결이 낙엽뿐인 폐사지에 잠들어 있다 생각하니 이를 떠올리는 것이 마치 남한산성의 긴긴 겨울을 연상케 한다.

박찬호 광주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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