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대웅보전
흥국사 대웅보전

남양주시는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광릉, 사릉, 홍·유릉)을 비롯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무장항일투쟁의 뿌리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영석 이석영(李石榮, 1855~1934) 등이 활동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특히 경기도 31개 시군 가운데에서도 봉선사·수종사·불암사·묘적사·흥국사 등 가장 많은 전통사찰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락산과 불암산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 왕실의 지원을 받은 원찰들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다.

수락산 흥국사(興國寺)는 남양주시 별내면과 서울시 노원구, 그리고 의정부시가 서로 접해있는 수락산 동쪽 덕릉마을에 자리잡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선조가 아버지인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능침사찰이다. 흥국사는 ‘흥국사사적(興國寺事蹟)’과 1927년에 간행된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 등의 기록에 의하면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법사가 ‘수락사(水落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1568년(선조 1) 선조가 생부인 덕흥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락사에 원당을 짓고 ‘흥덕사(興德寺)’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 이후로 주위에서는 덕흥대원군의 절이라 하여 ‘덕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덕흥대원군(1530~1559)은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며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이초이다. 1567년 명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3남인 하성군 이균(李均)이 즉위하여 선조가 되었다. 1569년(선조 2)에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아닌 왕의 아버지를 칭하는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후에 정원대원군(인조의 생부),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고종의 생부) 등이 등장하였다. 덕흥대원군묘(경기도 기념물 제55호)는 맏아들 하원군 이정의 묘역과 함께 수락산 남쪽에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하동 정씨와 함께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덕흥대원군 묘갈
덕흥대원군 묘갈

◇양난으로 소실 후 사세 넓혀
흥국사는 양난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1626년(인조 4)에 ‘흥국사(興國寺)’로 다시 사액되면서 다시 사세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 백련사 등과 함께 국가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머무르면서 왕실의 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로 선정돼 조선 왕실에서 특별히 관심을 보였던 원찰이었다. 1818년(순조 18) 요사채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4년 후 왕명에 따라 기허(騎虛)가 대웅전과 법당 등을 중건했다. 1856년(철종 7) 은봉 스님이 만월보전(육면각)을 중수하였으며,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와 중건이 이어졌다. 현재 흥국사 내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전(獨聖殿)·시왕전(十王殿)·산신전·만세루방(萬歲樓房) 등이 있다.

흥국사는 일주문을 지나 5분 정도 올라가면 2단의 축대 위에 자리잡은 대방(大房)인 만세루방(국가 등록문화재 제417호)을 만나게 된다. 만세루방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H자형 형태의 건물로 조선 후기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찰에서 건립한 다목적 전각이다. 덕흥대원군의 탄생 300주년이던 1830년에 효명세자의 허락으로 지어졌으며 왕실의 전통성 확립과 덕흥대원군의 추숭의 목적으로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상궁이나 왕실 여인들의 편의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 서울경기지역 사찰에서 성행한 만일염불회의 공간으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건물 중앙 추녀 아래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흥국사’현판이 걸려 있다.
 

흥국사 만세루방
흥국사 만세루방

◇대웅보전 지붕 마루에 특별한 조각상
만세루방 뒤에는 흥국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6호)’이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의 전각으로 1888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고종 때 건물 가운데 완성도가 높은 대웅보전은 계단의 소맷돌 조각과 초석, 지붕에 올린 잡상에서 그 특별함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지붕의 내림마루에는 ‘잡상(雜像)’이라고 하는 조각상이 각각 5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궁궐에서도 정전이나 편전과 같이 격이 높은 건물에 설치하는 장식 기와이다. 흥국사가 조선왕실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석파(흥국사 만세루방 현판)
석파(흥국사 만세루방 현판)

흥국사 전각 중에서 가장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 바로 ‘만월보전’이다. 대웅보전 북동쪽 계단 위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한 단 높인 대지 위에 지어진 건물로, 사찰에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1793년(정조 17) 이전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사찰 전각으로는 드물게 육각형 형태로 지어졌으며, 지붕은 모임지붕으로, 꼭짓점에는 항아리모양의 기와 장식이 있다. 만월보전의 여섯 개 기둥 가운데 전면을 향하고 있는 네 개의 기둥에 달려있는 주련의 글씨 또한 만세루방의 현판과 마찬가지로 ‘석파(石坡)’라고 하는 관지가 새겨져 있어 흥선대원군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을 갖는 시민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관광이 아니라 천천히 우리 문화유산을 음미하다 보면 이외의 장소에서 책에서만 봤던 문화유산을 직접 접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흥국사 만월보전 현판
흥국사 만월보전 현판

◇석조약사여래좌상 봉안
현재 만월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원래 병에 걸린 태조 이성계의 완치를 위하여 서울 정릉 봉국사에 있었는데 스스로 흥국사로 가시겠다고 하여 옮겨왔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표면에 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어 얼굴 표정을 살피기는 어려운 편이다. 전체 높이가 120cm인데 몸 전체 크기에 비해 얼굴 부분이 크며,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이 된다.

한편 만월보전 현판과 사찰에 전해오는 자료에 의하면 흥국사는 예로부터 화사(畵師)들이 많이 머물렀던 사찰로 ‘화사양성소’ 또는 ‘경성화소’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근세 화사들의 본거지였던 금강산 유점사, 마곡사, 통도사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뛰어난 금어(金魚)를 배출하여 화사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흥국사에서 화사로서 수행을 쌓은 많은 승려들은 전국 각지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하며 불화제작에 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국사가 조선 불화의 명맥을 잇는 가교역할을 했던 것이다.

석파(만월보전 주련)
석파(만월보전 주련)

지난 4월 20일 흥국사 만세루방(설법전)에서 열린 ‘수락산 흥국사 성보조사 및 가람배치 정비계획 연구보고회’에서 흥국사 주지 화암스님은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지닌 흥국사의 참모습을 알려 수행과 전법의 도량임은 물론, 앞으로 많은 사람이 찾는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가꾸길 서원한다"고 밝혔다.

조선 후기 왕실의 중흥조로 알려진 덕흥대원군의 원찰로만 알려졌던 수락산 흥국사가 앞으로는 다양한 불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전통문화공간이자 시민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힐링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김규원 남양주시청 학예연구사

흥국사 만월보전
흥국사 만월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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