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의사 대웅전
만의사 대웅전

화성시에는 용주사(龍珠寺), 만의사(萬儀寺), 봉림사(鳳林寺), 그리고 신흥사(新興寺)등 4개 사찰이 전통사찰로 등록되어 있다.

그 중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인 만의사는 화성시의 동북쪽 끝인 무봉산(舞鳳山) 기슭에 있다. 무봉산은 산의 모양이 봉황이 춤을 추는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만의사는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펴고 감싸 안은 듯한 자리에 터를 잡고 있다.

만의사 천불전
만의사 천불전

 

 

 

 

 

 

 


◇1천600년 신라시대 창건 사찰

만의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경내에 있는 안내문에 의하면 ‘1천600여 년 전 인도 고승이 범종과 불경 및 불사리를 가지고 지나던 중 오색구름이 영롱히 피어올라 살펴보니 어머니의 태속과 같은 명당이기에 절을 짓고 범종을 울리게 하였다’ 하니 오랜 역사가 전해옴을 짐작할 뿐이다.

만의사는 처음 창건된 후 폐사되어 오랫동안 황폐하였다가 천태종 진구사(珍丘寺)의 주지였던 혼기(混其)가 1313년(충선왕 5)에 크게 중창하고 법화 도량을 연 뒤부터 천태종 사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고려 말기의 우왕 때에는 이 절의 주지를 천태종과 조계종에서 교대로 맡게 되었는데, 두 종파에서 절을 두고 서로 다투게 되자 나라에서 절의 노비 약간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부에 귀속시켰다.

수원부지도 세부.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수원부지도 세부. 사진=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 후 1390년(공양왕 2)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공이 컸던 신조(神照) 대사가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하였고, 나라에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주어 경제적 기반을 굳혔다. 신조 스님은 이성계와 이방원이 머물기도 하였던 원주 각림사 출신이었으니 만의사는 이성계의 왕조 창업이 불교계 세력에도 기반하였음을 보여주는 사찰이라 하겠다. 1391년 정월에 7일 동안 소재 도량(消災道場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베푸는 법회)을 개설하였고, 다음 해 2월에는 덕이 높은 승려 330인을 초청하여 21일 동안 화엄법회를 열어 임금의 장수와 국가의 복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대규모의 법회 개최 사실을 통해 당시 만의사의 규모와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872년에 간행된 ‘수원부지도’에는 만의사의 위치와 함께 지도의 여백에 사찰의 연혁을 별도로 기재하고 있어 당시 사찰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제석천과 천왕문
제석천과 천왕문

◇ 현대의 것만 자리잡은 만의사

동탄 톨게이트에 인접한 중리저수지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무봉산 방향으로 들어가다 보면 ‘무봉산 만의사’라는 한글 현판이 걸린 일주문이 보인다.

절의 사역이 시작되는 큰 기둥의 일주문 옆으로 연못이 있고,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이 이어진다. 천왕문을 지나자마자 문 앞에 바로 제석천왕을 모신 작은 불당이 있는데, 이런 배치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드문 예이다.

이어 웃음 가득한 포대 화상을 지나 안쪽으로 더 진입하여 중층 누각인 봉서루와 범종각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사찰의 주불전인 대웅전 영역에 이르게 된다. 가람 내에는 이외에도 지장전·산신당·천불전·보현전·용왕전·삼성각 등의 크고 작은 전각들과 대형 석불상이 서로 비껴가며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전각과 석조물 등은 대부분 현대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의사 지장보살도
만의사 지장보살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얹은 전각으로 삼세불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 벽에는 조선후기에 제작한 지장보살도가 걸려 있다. 가운데에 앉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앞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합장하고 서있고, 그 주위를 시왕과 판관 등이 둘러서 있다. 그림의 아래에 쓰인 화기(畵記)에 ‘건륭 56년(1791)에 무봉산 장의사(莊儀寺)의 중단 탱화로 봉안한다’고 밝히고 있다. 화기에 쓰인 장의사가 만의사의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다른 사찰인지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지장보살도가 이곳 무봉산의 사찰에 조성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한편 원래 만의사 지장전에 모셔졌던 목조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일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은 지장전이 퇴락하면서 1894년에 용주사로 이운되어 지금은 용주사의 지장전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만의사에는 대웅전 옆에 새로 지장전을 지어 지장보살 입상과 스님의 초상조각을 모셨다.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은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나온 사리를 안치하여 최근에 세운 것이라 한다.

옛 만의사 터
옛 만의사 터

◇터도, 이름도 옮겨진 만의사

지금의 만의사는 조선시대에 옮겨온 자리로 원래는 이곳에서 1.8km가량 떨어진 신동에 있었다. 옛날 만의사가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의 초장지로 선택되면서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이때 절의 이름도 ‘萬義寺’에서 ‘萬儀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후 옛 만의사 자리에 새롭게 원각사라는 새 사찰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만의사 스님이었던 선화(禪華)당 대사의 부도와 탑비는 아직 옛터에 남겨져 있다. 원각사 옆으로 난 나지막한 산길을 따라 5분가량 오르면 선화 대사의 탑비와 소박한 석종형 부도에 다다른다. 탑비에는 대사가 1566년에 출생하여 1644년에 78세로 입적하였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로부터 수학하였으며 1646년에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정두경(1597~1673)의 시문집인 ‘동명집’에 의하면 만의사에 처음으로 신조 스님의 부도가 만들어진 후, 선화대사의 부도에 이르러서 7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일부는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선화대사의 부도 외에는 부도 명도 확인하기 어렵다.

팔달문 동종
팔달문 동종

◇수원 팔달문 동종은 사실 만의사 동종

만의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다른 문화재로 팔달문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이 있다. 이 종은 고려 1080년(문종 34) 2월에 개성에서 주조되어 만의사에서 사용하다가 1687년(숙종 13)에 새로이 주조한 것이다. 이후 수원화성 건설 시 화성행궁 앞 사거리에 종각을 설치하고 성문을 여닫을 때 쳤던 파루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의사로부터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1911년 팔달문으로 이전되면서 ‘팔달문 동종’으로 불리게 되었고, 2008년에 수원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은 2층 전시실에 전시 중이다.

동종의 크기는 높이 122cm, 지름 76.1cm로 조선 후기 종으로는 비교적 큰 편이다. 종의 상부에 2단의 범자문(梵字文) 띠를 새기고, 그 밑에 연곽(蓮廓)을 두고 연곽 사이에는 구름 위에 선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연곽 안에 9개의 꽃문양을 새겨놓았는데 가운데의 것만 꽃봉오리 모양으로 돌출되게 표현한 점이 특징적이다. 종신의 중앙 부분에 양각으로 명문을 새겨 종의 주조 내력을 밝히고 있다. 만의사에서는 창건과 중창 등 중요한 때마다 범종을 주조해 왔다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범종 주조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봉산중도(1746년, 종이·수묵, 25.3×39.8cm, 보물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중 리움미술관 소장
무봉산중도(1746년, 종이·수묵, 25.3×39.8cm, 보물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중 리움미술관 소장

◇송시열과 이황과 인연

한편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이 만의사에 자주 머물던 인연을 알게 해주는 그림이 있어 눈길을 끈다.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은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글에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4폭 등을 곁들인 서화첩으로 이 중에 ‘무봉산중도(舞鳳山中圖)’라는 그림이 그것이다. 그림 속에는 선비 둘이 계곡물이 흐르는 개울가의 초가지붕 정자에 마주 앉아 있다. 흰 수염에 사방관을 쓴 분은 우암이고, 갓을 쓰고 단정하게 앉은 분은 정선의 외조부인 박자진이다. 박자진은 우암을 찾아가 그의 글을 받아 퇴계 선생의 글과 한데 엮어 서첩으로 만들었고, 이후 겸재가 그 전말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의 두 인물 뒤로 우뚝 솟은 무봉산 봉우리가 보이고 개울 건너편으로 만의사의 전각이었을 두 채의 건물 지붕이 보인다. 실제로 무봉산에는 그림 속과 같은 바위 봉우리는 없지만, 계곡이 흐르는 지형이 옛 만의사 터와 비슷하여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만의사의 역사는 현 만의사뿐 아니라 옛 만의사 터의 부도들과 수원박물관의 동종, 용주사의 지장전 및 리움미술관의 그림첩 등 여러 장소와 유물에 전해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사찰과 함께 여러 곳을 함께 둘러보고 그 흔적을 직접 만나보면 좋을 듯하다.

이재연 화성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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