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마대
 

보적사는 독산성 동문 내에 자리한 사찰로, 독산성 입구에서 1km쯤 올라 독산성 동문을 지나면 경내가 펼쳐진다. 보적사를 중심으로 독산성 정상에 펼쳐진 독산성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으며 독산성 아래에 펼쳐진 오산과 수원, 동탄을 보노라면 임진왜란 당시 경기남부를 수호한 독산성이 가진 지리적 이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보적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본사 용주사의 말사이며, 구룡사, 마등사, 선불사, 대안정사, 황덕사 등 오산 내 다수의 사찰 중 유일하게 경기도 전통사찰(제34호, 1988년 7월 27일 지정)로 지정된 곳이다.

보적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다수의 의견이 있다. 보적사 내에 있는 ‘사적기(事跡記)’에는 ‘백제 제17대 아신왕 10년(401년)에 전승기원과 국리민복을 위해 세웠다.’라고 전하는데, 독산성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와 보적사 증축부지 시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 당시 백제의 축조활동과 건축물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또한, 1988년에 발행된 ‘오산시사’에는 고려 초기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뒷받침할 근거자료가 불충분하다.

조선시대로 넘어와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인조(仁祖) 3년 9월 4일 수원의 독성산성에만 도첩이 없는 승려가 3,000여 명이나 됩니다.’라는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많은 수의 승려가 포함된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찰고(寺刹考)’에 보적사의 연혁이 ‘선조임진 후 건축’이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보적사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크게 건축되었다고 판단된다.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防禦使 邊應星 善政碑, 오산시 향토문화재 제2호)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防禦使 邊應星 善政碑, 오산시 향토문화재 제2호)

그와 관련한 문화재로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防禦使 邊應星 善政碑, 오산시 향토문화재 제2호)’가 독산성 등산로 입구 서쪽에 위치한 서문주차장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독산성 등산로 왼편에 있던 것을 서문주차장 공원화 사업을 통해 본래 자리로 이전하였다.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선정비의 본래 위치는 독산성 밖 서쪽 주차장 입구 근처였으며 독산성 보수공사 때 주민들이 독산성 등산로 입구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화강암 재질로 된 방부원수(方趺圓首)형의 이 비석은 폭 62㎝, 두께 23㎝, 높이 143㎝이다. 특이한 점은 전면에 ‘방어사변응성선정비(防禦使邊應星善政碑)’라는 글자만 각자(刻字)되어 있고, 건립연도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변응성(邊應星, 1552~1616)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1579년(선조 12)에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장단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각종 전투에서 적을 섬멸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1602년(선조 35)에 경기방어사 겸 수원도호부사로 제수되어 부민을 모아 독산성을 쌓고 도량을 깊이 파는 한편 궁노, 석차, 포화, 기계 등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장정  500명을 모집하여 관군을 삼아, 적병 침범에도 성을 굳게 지켰다고 한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수원부(水原府)와 화성지(華城志)산성 독성(山城 禿城), 여지도서(輿地圖書) 수원부읍지(水原府邑誌) 등에도 위와 동일하게 1602년(선조 35년)에 부사 변응성이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 독산성을 석성으로 수축하면서 동시에 보적사도 중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보적사는 남한산성의 장경사와 같이 승군이 기거할 목적으로 지어진 ‘승영사찰(僧營寺刹)’이었다. 1831년에 쓰여진 화성지에 승군 103명 중 보적사에 6명, 용주사에 85명, 만의사에 12명이 배치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다수의 승군이 기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승도들은 1790년 용주사 창건 이후 용주사 총섭의 절제를 받는 승군으로서 1797년부터는 용주사 승도와 같이 15년 이상 거접(居接)하면 체가(帖加, 승군 내 일정 직책을 부여하는 첩지)되는 혜택이 주어졌다. 당시 독산성에 약 250~300호의 민가가 거주했다는 기록을 보면, 보적사는 당시 이 백성들의 신앙과 민생의 안정을 보살피면서 승군으로서 산성의 방비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적사 경내
보적사 경내

◇보적사→세마사→보적사 두 번의 명칭 변화

보적사는 그 명칭에 두 번의 변화가 있었다. 화성지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에는 보적사라고 불렸다고 생각된다. 그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어느 옛날에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있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겨우 쌀 두 되만이 남아 있었고 식량을 구할 방법도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자 노부부는 밥 한술 먹고 며칠을 사느니 차라리 이 쌀을 부처님께 공양하여 좋은 일이라도 하자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쌀을 부처님께 바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비어있던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 노부부는 이것을 나한님의 신통력이라 여기고 더욱 치성을 올리게 되었고 이후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위 전설에 전하는 것처럼 보적사는 본래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중심으로 한 사찰이었다.

1987년 보적사인 구건물을 개축준공하면서 세마사로 개칭했다.
1987년 보적사인 구건물을 개축준공하면서 세마사로 개칭했다.

이것을 1920년 주지였던 주대식스님이 헐고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1987년에는 도광정운(道光正云) 스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을 건립하면서 약사전에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보적사의 명칭도 세마사(洗馬寺)로 개칭하여 부르다가 1996년에 다시 본래 명칭인 보적사로 개칭하였다.

◇임진왜란과 밀접한 독산성·세마대·보적사

독산성 일주문에서 긴 등산로를 지나 독산성 동문을 통과하면 아담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주는 보적사 경내가 드러난다. 현대에 만들어진 3층 석탑과 대웅전이 일직선으로 있으며 대웅전 좌우로 요사채가, 그 뒤로는 산신각이 있어 가람을 구성하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좌상, 지장보살좌상, 약사여래상과 16나한 및 후불탱, 산신탱, 칠성탱의 불화와 범종이 있다.

3층 석탑에 절을 하고 고개를 올려다 보면 왼쪽 위로 세마대(洗馬臺)가 보인다. 독산성과 세마대, 보적사 이 세 유적은 임진왜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 성에 진을 치고 왜적을 물리쳤던 일에서 파생된 전설이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면서 세마대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기에 어려웠다. 적이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흩날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 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

1987년 보적사 세마사로 개칭했으나 1996년 다시 보적사로 개칭했다.
1987년 보적사 세마사로 개칭했으나 1996년 다시 보적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 당시 놀라운 기지로 왜군을 물리친 전설은 현재까지 전해져 세마대와 세마사 명칭의 근원이 되었으며, 독산성 문화제 등에서 주요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요즘은 독산성에 등산로와 삼림욕장이 개발 되어 있어 오산은 물론 인근 화성 주민들까지도 자주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독산성 등산로 입구를 지나 오르면 남문으로 이어지는 삼남길 옛길도 복원되어 있으며 독산성 삼림욕장도 개설되어 있어 도심지에서 자연을 온 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휴식지로 각광받고 있다.

독산성을 찾게 된다면 독산성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힘차게 등산을 시작하여 보적사와 세마대를 둘러 본 후 서문주차장에 있는 방어사 변응성 선정비까지 함께 보면서 독산성과 보적사의 역사를 한 번 느껴보는 것을 추천한다.

박연희 오산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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