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나선 이재명 의원이 얼마 전 이런 말을 해서 세상이 한동안 시끄러웠다. "저소득층, 저학력층 가운데 국민의 힘 지지가 많다." 그러자 국민의 힘 당이 ‘국민 분열, 편가르기’라고 공격에 나선 것은 예상대로인데, 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나선 박용진, 강훈식 후보가 ‘선민의식’, ‘이분법적 인식’이라고 비판하고 나온 것은 다소 의외였다. 그러자 민주당의 추미애 전 의원이 이재명 의원의 말은 사실이라고 거들고 나섰다. 추미애 전 의원은 지난 3월 대선 직후 1천100명 정도를 표본조사한 동아시아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저소득층, 저학력층에서 윤석열 후보 지지가 실제로 높았고, 반대로 고소득층, 고학력층에서는 이재명 후보 지지가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재명 의원의 말은 사실인가, 편가르기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명백히 사실이다. 다 알다시피 3월 대선에서는 방송사 출구조사가 놀라운 정확성을 보였는데, 그 조사를 보면 월 소득 200만 원 이하의 저소득층의 투표성향은 국힘당의 윤석열 후보 지지가 확실히 우세했다. 윤석열 대 이재명 지지율이 56: 40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재명 의원의 말은 편가르기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객관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대체로 민주당은 저소득층을 위한 정당, 국힘당은 부자들을 위한 정당으로 알려져 있고,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정책 토론이나 입법 과정에서 거듭 확인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저소득층이 자기를 위해 일한다고 알려진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국힘당을 지지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 밖이고,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이런 행동을 가리켜 ‘계급배반투표’라고 한다.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해적인 투표를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런 행동은 일견 다소 기이하기는 한데 사실은 새롭거나 특이한 것이 아니고 최근에 와서는 여러 나라 여러 선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미국의 토머스 프랭크가 2004년에 쓴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라는 책은 바로 이런 계급배반투표라는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쓴 책이다. 이 책의 우리말 번역자는 친절하게도 번역서의 제목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라고 달았다(김병순 역, 갈라파고스 출판사, 2012). 원 제목보다 이 제목이 책의 내용을 더 잘 전달해준다.

미국에서만 이런 계급배반푸표 현상이 발생한 게 아니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저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는 2019년에 『자본과 이데올로기』라는 새 책을 내서 역시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서 피케티는 주요 선진국의 선거 패턴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8년부터 2017년까지 약 70년 동안 서구 각국의 정치 갈등 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추적했다. 그는 투표성향 분석을 통해 좌파 정당의 지지층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케티의 분석에 의하면 적어도 1970년대까지는 계급투표가 이루어져 좌파 정당의 지지층은 저학력, 저소득층의 노동자계급이었고, 우파 정당 지지층은 고학력, 고소득층, 부자들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고학력층의 좌파 정당 지지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뚜렷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좌파 정당은 더 이상 불평등 해소를 바라는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이들이 대변하는 집단은 고학력의 지적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부유층, 고소득 엘리트들이다. 피케티는 학력, 지식, 인적자본의 축적을 지향하는 고학력층을 ‘브라만 좌파’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화폐와 금융자본의 축적을 지향하는 부유층을 ‘상인 우파’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피케티는 지금의 정치는 지적 자본을 중시하는 브라만 좌파와 물적 자본 및 금융자본을 중시하는 상인 우파 사이의 대결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해석이다. 피케티는 각국에서 브라만 좌파와 상인 우파라는 다중엘리트 연합이 교대로 집권하거나 연합의 틀로 함께 통치하며 현대의 불평등 체제를 고착화했다고 본다. 이 새로운 분석 틀을 통해서 바라보면, 과거 늘 민주당을 지지하던 미국 노동자들이 왜 트럼프에 몰표를 줘서 당선시켰는지, 한국에서 왜 ‘강남좌파’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피케티는 선거 사후조사를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의 유권자 투표성향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좌파 정당 지지자들 가운데는 저학력층이 많았고 고학력층이 적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완전한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좌파 정당에 대한 고학력층의 지지율이 저학력층보다 20% 포인트나 더 높게 나타난다. 이는 2차대전 이후 70년 사이에 선거 행태가 완전히 달라져 좌파 정당이 노동자들의 정당에서 고학력자들의 정당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계급배반투표는 최근 들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언젠가부터 쓰이는 ‘강남좌파’라는 말은 피케티가 말하는 브라만 좌파의 일종으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쉽다. 실제로 최근 한국 선거에서 계급배반투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표차로 이겼는데, 이때 투표성향을 소득계층별로 나누어보면 하류층과 상류층에서는 이회창 후보가 이겼고, 중류층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겼다. 노무현 후보가 중류층에서 이회창 후보를 이긴 표차가 워낙 커서 상하류 양층의 패배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하류층에서는 졌으나 중류층, 상류층에서 이겼다. 이런 식으로 한국의 저소득층은 최근 20년 동안 거의 모든 선거에서 계급배반투표를 하고 있다. 저소득층의 계급배반투표는 예외가 아니고 오히려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명백한 사실을 도외시하고 편가르기 운운하는 것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랴. 다만 이런 현상이 언론 탓이라는 이재명 의원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문제의 보다 본격적 분석이 필요하다.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