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에는 오래된 절이 감춰져 있네.’

송나라에 휘종 황제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수시로 궁중에 화가를 모아 놓고 그림 대회를 열었지요. 이럴 때면 직접 화제(畵題)를 정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황제는 ‘절’을 그리게 했지요. 대개 숲속 나무 사이로 절의 일부분을 짐작할 수 있는 지붕이나 탑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런데 황제가 1등을 준 그림은 어디에도 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요. 깊은 산속 작은 오솔길을 따라 물동이를 메고 가는 스님을 그렸을 뿐입니다. 황제는 "스님이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을 보면,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으냐?"라고 말했지요.



‘약초를 캐다 길을 잃었네 / 가을 나뭇잎 뒤덮인 첩첩 봉우리 /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간 / 숲 끝에는 차 끓이는 연기가 모락모락’ ‘채약홀미로(採藥忽迷路)/ 천봉추엽리(千峯秋葉裏)/ 산승급수귀(山僧汲水歸)/ 임말다연기(林末茶烟起)’



율곡 선생의 시 ‘산중(山中)’입니다. 어느 가을날, 약초를 캐러 산에 들었습니다. 약초를 찾느라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살피다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첩첩산중에 보이는 거라곤 무성한 나뭇잎. 덜컥 겁이 났지요. 이미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밀려드는데 방향을 잡을 수 없으니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건너편 숲 사이 스님이 물동이를 메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지요. 그러고 얼마 후 그 스님이 사라진 숲 끝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차 끓이는 향기가 바람 타고 와 온몸을 희망으로 물들입니다.

시는 대부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지요. 시인은 극도로 언어를 절제하고, 은유적인 수사를 동원해 내재율로 표현합니다. 설명이나 해석이 오히려 시 감상을 방해할 수 있지요.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지만, ‘산중’에 대한 나름의 상상을 통해 덧붙인 글도 어쩌면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에서도 그렇지만, 세상에서도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참 많지요. 삼라만상 중에 극히 일부만 보는 게 인생이지만, 조금만 달리 보거나 생각을 바꾸면 보이지 않던 게 보입니다.

제주도의 성산일출봉은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지만, 국권 상실기에 일본이 동굴을 파서 진지를 구축한 곳이기도 하지요. 이런 아픈 상처가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듯합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이지요. 어느 한 면만 보고, 어느 한쪽 얘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루 살펴도 객관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데, 기본적인 사항마저 놓친다면 비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40년 전, 저는 광주군청에서 일하다가 경기도청으로 왔는데, 깜짝 놀랐지요. 그동안 누구 못지않게 일 잘한다고 스스로 자부해왔는데, 그게 착각이고 꿈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야말로 범접(犯接)하기 어려운 고수가 많아 이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죽기 살기로 일하는 수밖에 없다고 이를 악물었지요. 참 힘겨웠습니다. 차라리 꿈속에서 살아온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지요.

현역에서 은퇴 후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지독하게 일해 남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과는 냈지만, 잘 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서가려는 욕심 때문에 여유가 부족했고, 앞만 보고 달리느라 옆의 것을 놓친 게 적지 않았고…. 또 다른 의미의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에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더 깊이 새겨야겠지요. 살다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스님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오기를 소망해봅니다.

홍승표 전 경기관광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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