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때 이웃학교 동두천초서 축구부 입단 제의
대학 중퇴 후 인천유나이티드 입단…국대에도 선발
발모제로 도핑 양성·음주운전 적발로 내리막길
중국 하위리그 뛰면서 몸관리…2017년 프로 복귀
다문화가정 어린이 위해 축구대회 개최…꾸준히 봉사하고파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 얼핏 외국인 같지만 우리나라 축구선수 강수일이다. 그는 다문화가정의 아이콘이었다. 불우한 가정환경을 딛고 프로리그에 진출해 두 자릿수 골을 기록하고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영광도 누렸다. 그렇게 계속될 것만 같던 그의 성공스토리는 연이어 터진 사건·사고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후 피나는 노력으로 프로리그에 복귀했고 다문화 아이들을 위한 축구재단 설립도 추진 중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자신을 반면교사 삼으라고 조언한다. 잘나가던 ‘다문화 아이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느덧 프로 16년 차, 선수로서는 황혼기를 보내고 있는 강수일 씨를 만나 역정 많은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인터뷰 진행 중인 강수일 선수. 사진=이세용기자
인터뷰 진행 중인 강수일 선수. 사진=이세용기자

-성장 과정이 궁금하다

초등학교 6학년 전까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어머니는 시청에서 제공하는 공공 근로 일을 하며 근근이 생활을 꾸려 나갔다. 재래식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집에 살기도 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으면 갑자기 쥐가 튀어나오는 그런 집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어머니는 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나갔다가 늦은 저녁이 돼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 많이 방황했다. 담배를 피운 적도 있었고 길거리에서 도둑질도 해봤다. 학교에서 친구들도 많이 괴롭혔다. 누군가가 나를 보기만 해도 싸움을 걸었다.

-친부와 헤어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다

친부는 파견된 미군이었다.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우리 어머니를 만났다. 미군 특성상 파견 국가에서 계속 머물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에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머니도 함께 데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친부를 따라가지 않았다. 아마도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가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렇게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 어머니는 나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친부한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강수일 선수와 친부  갈렌 웬델 존스 씨. 사진=강수일 선수 제공
강수일 선수와 친부  갈렌 웬델 존스 씨. 사진=강수일 선수 제공

-최근 유전자 테스트를 통해 친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친부)란 사람을 경멸했다. 입에 담는 것조차 싫었다.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욕부터 하기 일쑤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을 보여준 적 기억이 있는데 어머니는 그 이후로 사진도 다 없앴다. 원망이 그리움, 감사함으로 바뀐 것은 프로에 가서였다. 내가 프로축구 선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이나 신체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한 번쯤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 유전자를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해보라고 했다. 별다른 기대 없이 테스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며칠 후 미국에 있는 친부를 찾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릴 때부터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주셨던 강영철 목사님이 이메일을 통해 친부와 연락을 시도했다. 강 목사님은 친부에게 80년대 중반 동두천에 주둔해 있는 미군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지 물어봤고 한국에 있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고 있다고 전했다. 친부는 강 목사님께 근무한 적은 있지만 자신에겐 아들이 없다며 유전자 검사를 다시 진행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친부는 나의 존재에 대해 몰랐으니까. 그래서 강 목사님은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냈고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아들임을 인정한다며 요청했던 유전자 재검사도 필요 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2명의 아버지와 2명의 어머니가 생겼다. 작년에 친부와 재혼한 어머니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어를 잘하진 못하지만 아버지와 대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내가 일반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니까 어머니가 외국인 학교에 잠깐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잘 지내지 못했다. 특히 외국인 학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데 나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못 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매일 아침 울었던 것 같다. 일반 학교에서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고 외국인 학교에서는 영어 때문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어디에서도 이방인이었다. 학교에 적응을 못 하니 항상 겉돌았다. 매일 오락실 가서 게임만 했다.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공짜로 게임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게 일이었다.

강수일 선수. 사진=이세용기자
강수일 선수. 사진=이세용기자

-축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나는 동두천에 있는 보산초등학교에 다녔다. 어느 날 동두천초등학교의 한 학생이 나와 싸우면 이긴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다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싸우려고 동두천초등학교를 찾아갔다. 운동장 한쪽에서 싸우려고 하는데 어떤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 선생님은 우리를 나무란 후 싸움 대신 달리기 대결을 시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이 축구부 감독이었다.

감독님이 축구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는 너무 하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셨다. 아마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운동을 시키시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운동을 시키려면 일반 학생들보단 금전적 지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래도 축구가 하고 싶어 수업을 ‘땡땡이’치고 거의 매일 동두천초등학교로 갔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감독님이 결국 어머니를 설득해 축구를 할 수 있게 됐다. 회비나 장비 등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감독님이 우리 집의 상황을 이해해 많이 도와주셨다. 지금도 감사하다.
 

-아버지에게 운동에 대한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나

어렸을 때는 어떤 이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그저 ‘내가 잘하니까 잘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로에 가기 전까지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신체 조건이나 재능 등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저 증오와 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프로에 오니까 내가 얼마나 큰 것을 물려받았는지 느끼게 됐다. 어찌 됐든 프로에서 성공하려면 신체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더 빨라야 하고 힘도 좋아야 한다. 그때 처음으로 친부에 대한 고마움이 조금씩 싹텄다.

지난 9일 구리왕숙체육공원에서 진행된 글로벌 레전드 아카데미 축구교실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한 강수일 선수가 아이들의 움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사진=이세용기자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진출했다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에 빨리 프로리그에 진출하고 싶었다. 당시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테스트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장외룡 감독님이나 안종복 사장님이 나를 좋게 봐줘 번외 지명 선수로 프로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계약기간 1년에 연봉은 1천200만 원의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물론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돈을 벌어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다.
 

-다문화가정 출신의 혼혈 선수로서 프로 입단 초기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맞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양면성이 있다. 잘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았고 못하면 남들보다 더 많은 꾸중과 비난을 들었다. 언론이나 팬들이 축구 실력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나 역시도 프로 초창기에는 기량 향상보다는 어떤 쇼맨십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경기에 임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장에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장점이 있다면 수비 뒷공간으로 파고드는 움직임과 순간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다. 골을 잘 넣지 못했지만 빠르고 강한 공격수로 인정을 받았다.
 

-국가대표에도 선발됐다. 하지만 축구선수 강수일의 커리어가 내리막길로 접어든 시기이기도 하다

국가대표로 뽑혀 말레이시아에서 전지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도핑 테스트에서 양성 결과가 나왔다. 나는 주사도 맞지 않았고 약물을 먹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알고 보니 당시 안면 부위에 발랐던 발모제가 원인이었다. 이후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어떤 운동선수가 경기력 향상 시키려고 발모제를 얼굴에 바르겠나. 하지만 규정은 규정이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레전드 아카데미 축구교실에 참가한 한 아이가 강수일 선수에게 사인을 받고 있다. 사진=이세용기자
글로벌 레전드 아카데미 축구교실에 참가한 한 아이가 강수일 선수에게 사인을 받고 있다. 사진=이세용기자

-당시 받았던 징계도 꽤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에 내가 프로연맹에서 받았던 징계는 15경기 출장 정지였다. 그런데 상부 조직으로 올라갈수록 징계 기간이 계속해서 늘어났다. 최종적으로 FIFA에서 2년 출장 정지 징계를 내렸다. 항소도 해보고 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음주운전에도 적발됐다

징계를 받고 나니 정서적,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그때는 연봉도 받지 못했다. 대리비 1~2만 원이 아까웠다. 변명의 여지 없는 실수였다. 이후 한 몸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가 사라지니 한없이 초라해졌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두려웠다.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나

다시 축구를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축구이니까. 중국 6부리그에 가서 경기를 뛰기도 했다. 사실 중국 6부리그는 프로리그라고 할 수도 없다. 선수들이 경기 후에 담배를 피울 정도였다. 그래서 포천시민구단의 도움을 받아 주중에는 한국 선수들과 훈련을 하고 주말에는 중국으로 날아가 경기를 뛰는 일을 반복했다. 언젠가 프로리그에 복귀할 날을 꿈꾸며 훈련에 매진했다.

강수일 선수. 사진=안산 그리너스
강수일 선수. 사진=안산 그리너스

-2017년, 꿈에 그리던 프로리그에 복귀했다

경기를 뛰지 못하는 2년간 제일 힘들어했던 분은 어머니였다. 내가 다 포기할 것 같아 걱정하셨던 것 같다. 근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그리고 증명했다. 일본 리그와 태국 리그를 오가며 경기한 2년 동안 공격 포인트를 30개 이상 기록했다. 국가대표 발탁 전에 보여줬던 퍼포먼스에는 못 미쳤지만 프로의식이나 경기에 임하는 자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안산 그리너스에 소속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 축구하고 싶었다. 이전 소속팀이었던 제주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제주로 복귀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구단 측에서 내가 다른 구단과 계약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결국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안산 그리너스와 계약을 맺었다. 구단에 매우 감사하다.

-현재 부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경기 중 무릎을 다쳤다. 현재 열심히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내년에 복귀해서 팬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

지난 9일 진행된 글로벌 레전드 아카데미 축구교실에 참가한 강수일 선수와 아이들이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글로벌레전드
지난 9일 진행된 글로벌 레전드 아카데미 축구교실에 참가한 강수일 선수와 아이들이 함께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글로벌레전드

-마지막으로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사회 곳곳엔 아직도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꿈과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꿈이 클수록 버겁겠지만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지나고 보니 나 역시 그런 과정속에 성장했고 주위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제는 내가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고 싶다. 사실 코로나 발생 전까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축구대회를 매년 개최했다. 단지 일회성 이벤트로 그쳤던 것이 아쉬웠는데 앞으로는 재단을 설립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칠 생각이다.

이세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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