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은 불교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꽃으로 가장 귀중히 여기는 꽃이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연꽃 그 자체는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는 청정무구한 것으로 열반의 경지, 때묻지 않은 깨끗함을 상징한다. 청정한 연꽃의 아름다움은 불교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조형화되어 불상 대좌(臺座)나 광배(光背), 불화(佛畵), 불구(佛具) 등 불교 미술의 주요 문양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그 상징성으로 인해 연꽃의 이름을 가진 사찰이나 암자를 전국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양양 낙산사의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7일 동안 기도 후 바다 위 솟은 홍련(紅蓮) 가운데 관음보살 현신을 친견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며, 강화도의 백련사, 적련사(현 적석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는 고구려 장수왕 때 중국 동진의 천축조사가 오련산(五蓮山, 현 고려산)에 올라 오색 연꽃을 던진 전설에서 그 유래가 전해지는 이름이다. 그리고 수원에도 청련암이라는 사찰이 광교산 남단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광교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청련암 경내 모습. 

19세기 후반 경기지역 새로운 불화(佛畵)의 보고(寶庫)

아미타회상도 등 경기도 지정문화재로 지정

불화 하단에 붉은 칸 마련…기록들 남아

불화 조성 참여 스님·시주자 명단 수록

광교산 청련암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 있는 비구니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고려 말 창성사 암자 터에 1777년(정조1) 비구니 청련(靑蓮)이 심낙서 등의 시주를 얻어 창건하였다고 사력에 전하고 있다. 광교산은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수원을 북(北)에서 감싸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수원의 진산(鎭山)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는 광교산(光敎山)의 뜻처럼, ‘수원군읍지’에 의하면 광교산에는 89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하니 광교산 청련암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청련암과 관련한 옛 기록은 안타깝게도 쉽게 찾아지지가 않는다. ‘수원군읍지’(1899) 사찰편에 북부 광교산 아래 삼리(三里) 되는 곳에 있다는 존재의 흔적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건축물과 사찰에 전해지는 19세기 후반의 불화와 화기(畵記)를 통해 이무렵 커다란 불사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전각은 대웅전 좌측에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으로 189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법당 안 중앙에는 아미타삼존상과 광서18년(光緖 : 중국 청나라 제11대 황제 연호로 1892년에 해당)에 조성된 아미타회상도(阿彌陀會上圖)가 봉안되어 있으며, 향우측에는 신중도(神衆圖, 1892)가, 그리고 향좌측벽에는 가로 455cm에 달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1891)와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청련암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극락보전(사진 왼쪽)과 독성각. 
청련암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극락보전(사진 왼쪽)과 독성각. 

이 불화들은 모두 경기도 지정문화재로, 특히 영산회상도(도유형문화재 제221호)는 석가삼존과 십대제자, 보살, 사천왕 등으로 구성되는 일반적인 영산회상도와는 달리, 석가삼존과 16나한을 중심으로 묘사되면서 가로가 길어지는 구도인 만큼 권속들이 모두 좌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조선후기 작은 규모의 사찰에서는 한 전각 안에 여러 존상을 함께 봉안하여 다용도로 사용했던 만큼, 청련암 극락보전도 아미타불이 주불이지만 영산회상도 또한 봉안되어 있는 연유라 여겨진다. 그리고 본존의 신광(身光)을 금색으로 가득 칠하고 있는 아미타회상도(도문화재자료 제146호)의 모습이나, 위태천(韋태天)을 중심으로 모든 권속들이 자연스럽게 둘러싸고 있는 신중도(도문화재자료 제147호)의 구도와 금니(金泥) 수법 역시 19세기 후반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극락보전의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가로 구도가 인상적인 수원 청련암 영산회상도 (1891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1호)
극락보전의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가로 구도가 인상적인 수원 청련암 영산회상도 (1891년,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1호)

이외에도 칠성각 내에는 청련암 소장 불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인 1887년에 제작된 칠성도(도문화재자료 150호)와 산신도(도문화재자료 제149호)가, 독성각 내에는 독성도(경기도문화재자료 제148호)가 봉안되어 있다. 칠성, 산신, 독성은 각각의 전각 안에 봉안되거나, 삼성각에 칠성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도와 산신도가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에 비해 청련암은 독성도만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청련암 불화에는 모두 화기(畵記)가 전해지고 있다. 불화 하단에 붉은 칸을 마련하고 그림과 관련된 기록을 적어두는 화기는 조성 연대와 조성 목적은 물론 불화 조성에 참여했던 스님들, 시주자 명단과 보시물목 등이 담겨있어 화원 연구를 비롯해 당시의 신앙형태와 사원경제의 한 단편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아미타회상도 화기에는 1892년 수월도량 청련암의 상단불화로 제작하였으며, 같은 해 독성도, 신중도, 산신도와 함께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취암승의(翠庵勝宜), 의암현조(義庵眩眺), 긍조(肯照) 등이 화사로 참여하였는데, 의암현조는 남양주 흥국사 나한도를 그렸던 인물로 기록에 나오는 불화승들은 19세기 후반 서울과 경기에서 활동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정경부인 이씨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시주자로 참여하며 불화 제작에 많은 정성을 들이면서 19세기 말 청련암은 상당한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후반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수원 청련암 신중도(1892년, 겅기도문화재자료 제147호)

영친왕 생모 순비(淳妃) 엄씨의 중창 불사

불화 불사가 있은지 10년 후인 1902년, 청련암은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1854~1911)가 중창 불사를 행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순헌황귀비 엄씨는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재위 1863~1907)의 후궁으로 5세에 궁녀로 입궁한 후 상궁부터 귀인(貴人, 1897), 순빈(淳嬪, 1900), 순비(淳妃, 1901), 황귀비(皇貴妃, 1903)에 이르기까지 내명부 최고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1896년 아관파천을 성공리에 완수하고 1897년 44세의 나이로 아들 영친왕 이은(李은 1897~1970)을 낳았다. 엄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급격한 신분상승을 이룬 인물이지만, 근대기 여성 인재양성을 위해 큰 후원자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크고 작은 불사에 왕실의 재산을 내려 불교계 발전에도 기여하는 바가 컸다. 고종대는 조선말기 중 왕실의 불교후원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특히 왕실의 안녕과 선왕선후(先王先后)의 추복(追福)을 기원하는 내용이 많았다. 1902년 청련암 중창은 순비(1901.10~1903.12) 시절 이루어진 것으로, 청련암 봉향각에서 오랫동안 기도한 인연으로 절을 중창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외에도 순비는 청주 용화사 창건, 고양 흥국사 아미타괘불 발원, 서울 청룡사 가사도(袈裟圖) 발원 등 그 해에 많은 불사를 행하였다. 왕실 일가의 안녕과 영친왕을 위함이었다. ‘甲寅生嚴氏大蓮花’라는 화기를 통해 알려진 엄씨의 법명은 ‘대연화(大蓮花)’로 불교의 세계를 상징하는 큰 연꽃이었다.

비구니 故 영선스님(왼쪽 사진)과 비구니 도문스님. 
비구니 故 영선스님(왼쪽 사진)과 비구니 도문스님. 

21세기 도심 속 연화(蓮華)의 세계

한국전쟁 이후 쇠락의 길 걷기도

영선 스님, 요사채 2동 신축 등 발전시켜

도문스님, 불사 전개로 오늘날 사격 갖춰

1984년부터 유치원 운영…지역에 이바지

1902년 순비엄씨에 의해 중창된 청련암이었지만, 한국전쟁 후 이 곳은 쇠락한 사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1955년 10월 비구니 영선(永善)이 주지를 맡아 요사채 2동을 신축하고 대웅전 건립을 추진하는 등 가람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1983년 영선스님의 제자였던 비구니 도문스님이 주지를 맡으면서 그 해 대웅전 단청, 석가삼존불상(석가, 문수, 보현) 봉안, 지장탱화 및 신중탱화 조성을 비롯해 환희당(1987년), 범종각(1990년), 석가탑(1992년), 불교교육회관(2013) 건립까지 대대적인 불사를 전개해 오늘날의 사격(寺格)을 갖추었다. 올해로 세수(世壽) 87세인 주지 도문스님께서는 1967년에 이 곳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니, 55년째 반세기 이상을 청련암과 함께 하신 셈이다. 현재 청련암은 도시와 산이 맞닿는 곳에 위치해 앞쪽의 도시 풍경과 뒤편의 산세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21세기 도심 속 사찰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청련암은 수행도량의 역할과 함께 부설 연화유치원을 1984년부터 운영하면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추는 오후, 3~5세 유치원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적막한 산사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맑은 눈, 순수한 귀, 자비로운 마음’이라는 연화유치원의 원훈(園訓)은 비단 원아들만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애초에 갖고 있던 불성(佛性)을 깨우는 말로 느껴진다. 잊고 있었던 내 자신의 본성(本性)에 작은 울림을 준다.

김수현 수원시청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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