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개산과 심원사의 모습
보개산과 심원사의 모습

청정한 아미천 계곡 등 신비한 비경 유명

한반도 정중앙 지형 보개산 자락에 위치

1393년 무학대사, 홍림사서 심원사 개칭

6·25 등 겪으며 소실…2002년 복원 불사

◇명산 보개산의 상징 심원사의 연혁

지장신앙으로 유명한 연천 심원사(深源寺)는 연천군청에서 불과 12㎞ 떨어져 있는 보개산(寶蓋山) 자락에 위치한다.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한 가운데 그리고 개성과 서울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는 연천군은 역사적으로 많은 부침이 있었고 심원사도 다르지 않았다. 천년고찰 심원사가 갖가지 시련을 거쳐 항일의병의 중심에 있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긴 여정을 떠나보고자 한다.

심원사 근경.
심원사 근경.

연천읍에서 심원사로 향하는 길은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한 동막리 유원지로 사시사철 청정한 아미천 계곡과 그 주변으로 울창한 원시림의 비경이 그야말로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이중 가장 유명한 명승지는 연천 현감을 지낸 윤두수(尹斗壽)가 아미천의 물과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절경에 매료되어 찬취암(찬翠巖)이라고 명명한 곳이다. 이곳은 2020년 등재된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명소 중 하나인 '동막리 응회암'으로 이름을 올렸다. 예로부터 보개산은 금강산, 오대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명산으로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불가에서 말하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추앙을 받아온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 4대 사찰 중 하나인 유점사에 속했던 조계종 심원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942년 간행된 유점사 본말사지(楡岾寺 本末寺誌)의 심원사지(深源寺誌) 편에 따르면, 647년에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영주산(현 보개산)에 영원사·법화사·흥림사·도찰사를 차례로 창건한 후, 859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흥림사를 중창하고 천불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심원사의 기록으로 보아 역대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원찰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1393년 화재로 모든 전각이 전소된 3년 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건물을 다시 짓고 영주산을 보개산으로 흥림사를 심원사라 개칭하였다. 15세기 대표적인 시인 김시습은 이 사찰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겼다. 임진왜란으로 다시 전소된 사찰은 1595년 인숭과 장인에 의해 다시 건립되었고 서산대사의 법맥을 잇는 소요(逍遙), 태능(太能), 제월(霽月), 경헌(敬軒) 등 조선 중기의 선승들과 수많은 학승들이 주석 정진하는 도량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청허당 문인 등 많은 고승대덕이 머물며 생활하였던 사찰로 성주암, 석대암, 지장암, 남암 등 많은 부속 암자를 거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일제에 의해 전소된 심원사는 1909년부터 점차 복구되어 1937년 주지 이진학(李鎭學)의 노력으로 유점사 본말사지에 전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본전인 천불전, 산신각, 춘향각, 요사채 등 모두 8동의 건물을 갖추게 되었다. 1940년대까지 심원사는 12개의 암자와 32위의 탱화, 1천609위의 불상, 탑 2기 그리고 250칸의 당우를 갖춘 큰 절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지장보살석상 1위, 공적비 2위, 지장영험비 1위, 부도 12기만이 남게 되었다.

심원사 입구의 부도군
심원사 입구의 부도군

1955년 보개산 입구로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심원사는 사실상 폐사되었고, 이때 심원사 석대암에 있던 지장보살상이 철원 동송으로 옮겨지며 이건되면서 명맥을 이어갔다. 2002년부터 심원사 터에 대한 본격적인 복원불사가 시작되었고, 2003년 첫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천불전, 봉향각, 명부전, 산신각, 구천불전 등 건물 5개의 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2003년 본당인 극락보전(천불전) 복원을 시작으로 정비사업도 본격화되었다. 2006년 경기도 기념물로 그 터가 지정되었고, 2007년부터 2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유점사 본말사지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사찰의 영역과 여러 형태로 증개축된 현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된 심원사는 철원 심원사와 구분하기 위하여 원심원사로 일컬으며, 2019년 출입구 석축조성을 끝으로 복원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석대암을 제외한 주변의 작은 암자들은 여전히 터로 남아있다.

심원사 입구의 항일의병비
심원사 입구의 항일의병비

1907년 고종 퇴위·군대해산 항거해 항쟁

한반도 남북단 연결지로 항일의병 주무대

일제에 위협적 존재…서울 탈환작전 수행

1910년 10월까지도 한말의병 명맥유지

심원사 입구 무명 의병들 묘역·비 세워져

하루속히 연천항일의병사 진실규명 되길

◇ 항일 의병항쟁의 중심, 보개산 심원사

1907년 고종황제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에 항거하여 전개된 후기 의병항쟁은 특히 임진강 및 보개산 유역을 중심으로 연천군 전 지역에서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이 일대가 후기 항일의병의 주요 무대가 된 것은 연천지역이 한반도 북단과 수도를 연결하는 실제 거리상으로나 지형적으로 유리한 수로ㆍ육로 상 교통의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보개산ㆍ고대산 등 연천지역의 높고 험준한 지형 또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이었다. 또한 거기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연천사람들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입에 죽기를 각오하고 결연히 싸운 정발장군, 청허스님을 비롯한 심원사의 많은 승려 의병들과 당시 군민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의 기반을 이루게 한 미수 허목(許穆) 선생의 학문적 전통 등이 바로 연천사람들의 사상적 토양이 되었다.

연천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왕회종(王會鐘)ㆍ박종한(朴鐘漢)ㆍ한창렬(韓昌烈)ㆍ전복규(全福奎) 등은 독자적으로 혹은 허위ㆍ연기우ㆍ김수민ㆍ김규식 등의 다른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연천 의병은 서울에서 불과 70km 내외의 가까운 인근 지역인 강화ㆍ개성ㆍ파주ㆍ양주 등 경기 북부와 철원 등 강원 서북부에 전선을 형성, 일제 침략의 심장부인 서울을 압박하고, 특히 임진강과 한탄강을 근거지로 하여 2개의 간선 도로인 경원·경의 도로 부근에서 그 기세를 떨치며 일제에게 가장 큰 위협적 존재 역할을 하였다. 소위 ‘연천의병’의 최고 지휘관은 왕산 허위(旺山 許蔿)였다. 그는 이인영, 이강년, 민긍호 의진 등과 연대하면서 1907년 말 결성한 최초의 전국 연합의진으로 48개 의병부대 약 1만여 명의 의병과 함께 서울 탈환작전을 두 차례나 펼친 ‘13도 창의군’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했다. 그 결과, 연천의병은 두 차례 서울탈환작전의 주력부대로 활약하며 끊임없이 일본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 활동의 대표적인 근거지 중 한곳이 바로 천년고찰 보개산 심원사이다. 이들은 적게는 20~30명에서 60~70명의 소규모 의병부대로 활동하다가 많게는 200~300명 내지 400여 명의 연합부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다. 의병은 비록 기동성과 화력 면에서는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지만 변장술이나 지형 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심원사에서의 첫 교전은 1907년 8월 16일로 이날 허위 의병진 100여 명이 김화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의병 70여 명이 전사하였다. 같은 해 9월 10일 2차 김화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80여 명이 전사하고 일본군도 사상자가 많았다. 9월 27일 허위부대 800여 명은 토벌대의 기습정보를 알아내고 활동근거지를 분산하여 이동하던 중 150여 명의 의병이 심원사 인근 법화동에서, 250여 명의 의병이 대광리에서 김화수비대와 일본 측 연합토벌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10월 17일에는 의병 4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다시 김화수비대의 기습을 받았다. 일제는 심원사가 의병의 본거지라는 이유로 당시 심원사 250여 칸의 사찰을 전소시켰다. 1908년 6월 11일 총대장 허위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하고 몇몇 지휘관이 전사한 연후에도 스스로 의진을 수습하여 1908년 6월 25일 의병진 20명이 일본수비대와 교전하였다. 국치이후인 그해 10월까지 연천 의병의 저항은 한말 의병의 마지막을 이어갔다.

연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게는 3천여 명에서 많게는 5천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연천의병은 1907년 8월부터 1910년 10월까지 70여 차례 이상 일본군과 교전하며 연천군 전역에 많은 전적지를 남겼다. 다행히 천년 고찰 심원사는 또 다시 복원되어 전통사찰로서 그리고 의병항쟁 전적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무명 항일의병묘역과 함께 항일의병비가 심원사 입구에 세워져 있지만 연천 항일의병과 전적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않은 채 잊혀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연천 항일의병사에 대한 진실이 하루속히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윤미숙 연천군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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