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소백은 차분했다. 나뭇가지 위로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오랜만에 아내와의 데이트인데 해발 1천376m, 꼬박 하루가 걸리는 산을 택하다니. 그것도 시댁 뒷산을. 도발이었다. 의외로 아내는 별 저항(?)이 없었다. 왜일까. 뭔가 원하는 걸까. 겨울코트? 가방? 말이 없다. 의문을 미뤄두고 산을 올랐다. 

등산로는 희방사 주차장에서 출발해 연화봉-제1연화봉에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왕복 10km 정도의 거리로 초급자에겐 난이도가 꽤 있는 편이다. 예전엔 주로 풍기 삼가동에서 올라 희방사 쪽으로 내려왔지만, 이번엔 차를 가져온 터라 올랐던 곳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동네 공원길 정도 걸어본 체력으로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이 살짝 됐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쉬엄쉬엄 오르리라 다짐했다.

출발은 부드러웠다. 모난 데 없이 완만한 경사에 오랜만에 깊은 산 공기를 들이키며 걷는 기분은 도시에선 느껴보지 못한 호사였다. 여름내 짙푸르던 숲은 어느새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자취를 감췄고 휑한 바람만 떨어진 낙엽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때 되면 다 저렇게 될 걸 뭘 그리 치열했는지… 계절의 변화가 무상하다. 그렇게 겨울산의 정취에 빠져 30여 분가량 오르니 높이 28m의 희방폭포가 위용을 드러냈다. 아직 완전히 얼어붙지 않은 물줄기가 산중의 적막을 깨고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곧 하얗게 탈색되어 얼음기둥으로 굳어질 것이다. 고개 돌려 옆을 보니 전에 없던 구름다리가 보였다. 폭포를 넘어 산 위로 오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길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20년이 넘었으니. 속절없는 세월의 변화를 또 한 번 실감했다. 폭포를 눈에 담은 채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제 소백산 초입에 들어선 셈이다. 해발로는 이미 절반 이상이 지났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인 난코스가 기다린다. 얼마쯤 걸었을까. 너덜길을 지나자 급경사 계단이 나타났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계곡 사이로 높게 뻗어 올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맨몸으로 올랐던 산이었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새벽까지 놀다 느닷없이 의기투합해서 오르곤 했다. 한 친구가 "내일 철쭉제 한다는데 함 가까?" 하고 운을 띄우면, 서로의 눈을 쳐다보다 누구랄 것도 없이 "됐나?"를 외쳤다. 그러면 일제히 "됐다!"하고 합창이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싶다. 

겨울이라 몸이 빨리 식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기던 순간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얼마나 남았나요?", "다 왔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입니다." 하산객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고 옅은 미소마저 보였다. 알다시피 거짓말이었다. 급경사 계단 지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팽창하고 호흡은 격하게 차올랐다. 여러 번 올라봤지만 오래전인데다 등산로가 많이 정비되어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겨우 급경사를 벗어나니 연화봉을 가리키는 푯말이 나타났다. 깔딱고개를 넘어섰다는 표시였다. 여기서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언덕길. 그렇게 장장 3시간여의 사투(?) 끝에 연화봉 정상에 도착했다. 시린 하늘과 부딪쳐오는 바람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능선과 마주 누운 하늘, 그 사이를 흐르는 구름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스라이 펼쳐졌다. 우리는 표지석 옆에서 인증샷을 찍고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에 자리를 폈다. 준비해온 도시락과 정상주를 한잔 들이키니 그대로 산이 된 듯했다.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 너무 힘들어 중간에 그만하고 내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충분히 올라왔으니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지친 순간 ‘조금만 더’를 외쳐준 하산객의 격려가 한계를 넘어서는 데 큰 힘이 됐다. 무엇보다 나를 믿고 같이 온 사람이 있는데 그럴 순 없었다. 손을 잡아주고 기운을 북돋아 줘야 했다. 정상은 그런 것들이 합쳐져 도달할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일도 삶도 다르지 않으리라.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도전할 때 정상은 가까워진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끝내 오를 수 있다는 걸 소백산 정상에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내가 나를 보고 씽긋이 웃는다. ‘뭔가’가 없다는 뜻일까?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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