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人Story

다문화인 200만 시대다. 주위를 둘러보면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념은 아직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부일보는 이에 대한 간극을 좁히고자 ‘다문화人Story’를 연재한다. ‘다문화人Story’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문화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소개하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당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흑인 혼혈 1세대 제임스 킹(58) 씨가 불우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한 말이다. 유년시절 늘 이방인이었던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어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축구를 곧 잘해 한때 프로선수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의 집은 꿈을 키워줄 형편이 못됐다. 그렇게 ‘튀기’는 먹고 살기 위해 밤무대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임스 킹 씨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삐에로가 된 것 같아 슬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혼혈 가수의 인생은 트로트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20년을 미국인인 척하며 살았지만 흥겨운 목소리로 전통가요를 부르자 사람들이 다가왔다. 누구도 피부색만 보고 도망가지 않았다. 움츠리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자 새로운 삶이 펼쳐진 것이다. 이제는 받은 사랑을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제임스 킹 씨. 여름 햇살이 남아 있는 9월의 가을날 수원의 야외음악당에서 그와 마주했다.

미군 아버지, 행정병으로 근무중 본국행

누나 맹장염 죽음으로 가족이민 무산

양주서 유일한 혼혈인…어려서부터 방황

-‘혼혈 1세대’로 알려져 있다.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셨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기 전 가정을 꾸리고 계셨다고 한다. 그런데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 남편이 북한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어머니는 이후 양주에 터를 잡고 홀로 아이를 키웠다. 미군이었던 아버지는 행정병으로 근무했는데 진지에 침투한 북한군을 사살하면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보다 못한 지휘부가 아버지를 양주에 있는 미군병원으로 전출시켜 일과 치료를 병행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때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어떤 사연이 있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린 것은 아니다. 행정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아버지는 북한군을 사살한 장면이 떠오를 때면 항상 술로 고통을 달랬다고 한다. 계급도 중위에서 특무상사까지 떨어졌는데 미군 측은 아버지를 사상병으로 처리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태어나기 한 달 전이다."

-가족들은 왜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나?

"내 생각이긴 한데 아버지는 한국에 오기 전 이미 미국에 가족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를 계속 데려오려고 노력은 했다고 들었는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생활비는 꾸준히 보내주고 우리 가족을 챙기셨다. 내가 8살 정도였던 해로 기억하는데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려고 한 적이 있었다. 비자도 모두 신청한 상태였다. 그런데 출국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누나가 갑자기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미국행은 없던 일이 됐다."

유년 시절 제임스 킹 씨와 그의 어머니. 사진=본인제공

-혼혈아의 삶.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동네 아이들은 나를 ‘튀기(혼혈아를 비하하는 은어)’라고 부르며 놀리기 일쑤였다. 옆 동네 의정부만 해도 미군 부대가 주둔해 있어서 혼혈아가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런데 양주에는 내가 유일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내 피부가 검으니까 피도 검을 거라고 놀렸다. 너무 화가 나 피가 빨갛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스스로 손목을 그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황을 많이 했다."

-어머니가 힘드셨을 것 같다.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피부가 남들보다 검은지 몰랐다. 당시만 해도 잘 씻고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다들 꾀죄죄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유독 나를 잘 씻기고 머리도 항상 정갈하게 빗겨 주셨다. 아마도 피부가 조금이라도 더 하얘지고 곱슬머리가 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늘 내가 놀림을 받을까 노심초사하셨다."

-그런데 현실은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랐던 것 같다.

"맞다. 어릴 때는 철이 없으니까 놀림 대상을 찾아 짓궂게 행동한다. 고백하자면 나도 다른 아이들을 놀리고 괴롭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놀림의 대상이 내가 되는 순간 방황이 시작됐다. ‘깜둥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아무리 맞아도 육체적으로 아픈 줄 몰랐다. 정신적으로 더 아팠기 때문이다."
 

제임스 킹(사진 가운데) 씨의 학창시절 모습. 사진=본인제공 

-피부색과 관련한 기억이 있다면?

"학교 다닐 때 가장 싫어했던 과목이 역사였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단일 민족 국가’라고 가르쳤다.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들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나는 그런 시선 하나하나에 상처를 받았다. 수업이 끝나면 쳐다봤던 친구들을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지금이라면 ‘쳐다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축구선수 꿈 접고 나이트DJ·가수 활동

美 흑인가수로 살며 회의감에 사업 시작

화장품·패션사업 등 모두 잘 풀리지 않아

-학창시절의 꿈은 뭐였나?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당시 별명이 ‘펠레’였다.(웃음) 동네 형들과 어른들한테 예쁨을 많이 받았고, 면 대항 경기에 대표로 뽑힐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선수가 되려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 형편으론 무리였다.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공장 취직을 알아보기도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돈을 벌기 무슨 일을 했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백인 혼혈의 한 남자를 만났다. 다짜고짜 ‘뭐 하고 사냐’며 묻길래 공장 취직을 알아보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튀기’가 왜 공장에서 일을 하냐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그를 따라서 시작한 일이 나이트클럽 DJ였다. 그때가 1983년이다. 당시 대기업 일반사원 월급이 20만 원 정도였는데 DJ를 하면 한 달에 30만~40만 원을 준다고 하더라.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일을 시작했다."

-실제로 약속된 월급을 받았나?

"전혀. 실제로 받은 돈은 훨씬 적었다. 급여에 대한 불만이 생길 때쯤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 흑인 혼혈 형을 알게 됐다. 그 형은 나한테 ‘먹통(흑인 혼혈아를 뜻하는 은어)은 먹통끼리 놀아야 된다’면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 그래서 그 형을 따라갔는데 노래도 가르쳐주고 급여도 약속한 대로 꼬박꼬박 챙겨줬다. 사이가 항상 좋았던 건 아니지만 내가 가수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주로 어떤 노래를 불렀나?

"당시에 유행하는 팝송은 다 불렀다. 나이트클럽 사장들은 나를 미국에서 온 흑인가수로 소개했다. 영어도 전혀 못 하는데 피부색이 검다고 그렇게 소개한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거절할 수 없었다. 당연히 노래하는 게 싫었다. 한국인인데 미국인인 척하는 것이 너무 슬펐다. 내가 사업을 많이 벌인 이유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나아지면 언제든 노래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나이트클럽도 운영해봤고 패션 사업, 화장품 사업도 해봤다. 그런데 다 망했다. 하기 싫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노래였다."
 

TV 출연계기로 '트로트 가수' 권유 받아

트로트하며 '내 자신 사랑하는 법' 깨달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 아픔 치유해주고파

-지금은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계기가 있었나?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녹화 전 사전 미팅을 하는데 내 이야기를 듣던 한 작가가 나에게 과거의 안 좋은 기억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하더라. 그러면서 트로트로 전향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했다. 그때 처음 ‘트로트를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알고 지내던 한 방송국 PD가 트로트 작곡가로 유명한 박성훈 씨를 소개해줬다. 트로트 가수가 된 계기다."

-트로트를 하게 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생이 달라졌다. 트로트를 부르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나이트클럽에서 팝송을 부를 땐 술에 취한 손님이 술 한잔하라며 부르는 것이 다였다. 트로트를 하니까 남녀노소 모두 반겨줬다. 특히 복지관 같은 곳에 노래를 부르러 가면 할머니들이 내 땀을 닦아주고 용돈도 쥐여주더라. 피부색만 보고 도망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찾아주니까 고마웠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늘 회피했기 때문에 힘든 시기를 보냈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내가 변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한국인, 한국인 가수로 인정받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받은 사랑을 나와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목표이자 꿈이다. 특히 지방을 다니다 보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다. 그들은 피부색이 달라서, 언어가 서툴러서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해주고 싶다. 내 노래 중에 ‘웃으면 복이와요’라는 곡이 있다. 노랫말처럼 아이들이 언제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이세용기자
사진=노민규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