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사건으로 우리 사회 재벌 3∼4세들의 경영행태와 도덕성이 낱낱이 해부되고 있다.

 '무소불위의 젊은 권력자', '불통의 황태자'라는 말이 들려온다. 글로벌 회사를표방하는 기업조차도 온통 오너가 보호에만 매달리다 보니, 견제와 균형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를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와 경제단체, 시민사회단체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덧 재벌가의 주류로 자리잡은 오너 3∼4세들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자 글로벌 경쟁의 리더로서 제 역할을 하기 위해 재벌 3∼4세들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점을 6가지로 짚어봤다.

 ◇ 쉽게 되고 쉽게 올라간다

 재벌 3∼4세의 경영자 입문 코스는 천편일률적이다.

 조기에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20대 중반에 입사하면 3∼4년 만에 초고속으로 승진해 임원이 된다. 거기서 또 3∼4년 안에 부사장, 사장 타이틀을 달고 경영자의 지위에 오른다.

 독일의 프리미엄 가전 브랜드 밀레는 창업가문인 밀레가와 칭칸가에서 1명씩 오너경영인을 배출하고 전문경영인 3명과 더불어 5인의 공동 경영체제를 갖추는 기업집단으로 유명하다. 오너가에서 1명씩 경영자를 선임하는 과정은 외부 전문가위원회의 평가까지 거쳐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한국의 재벌은 왕조처럼 운영된다"고 지적했다. 왕실에서 왕세자를 책봉하고 이양 작업을 하듯이 '세습' 이외에 다른 변수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협동사무처장은 "재벌 3세가 경영에 참여하려고 한다면 평사원부터 시작해야 한다. 동시대의 젊은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소통이 필요하다"며 "그래야만 급변하는 경제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고말했다.

 안 처장은 "협력업체와 소비자로 이어지는 기업의 사회적 선순환 관계를 구축하려면 오너 3세가 각계각층을 사려깊게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자세를 갖춰야 한다"며 "지금과 같은 오너십에 안주하다간 총수일가 리스크만 가중될 뿐"이라고 꼬집었다.

 ◇ 쉬운 일만 골라서 한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평소 강조하던 지론이 있다고 재계의 한 인사는 전했다.

 "부산공장에서 일할 때 매년 와이셔츠 수억장을 만들어 수출했다. 그 물량 중 10%만 국내에 팔았다면 국내업체들 다 죽었을 거다. 그만큼 수출이 중요하다. 그런데 요즘 창업주의 3,4세들은 내수에만 신경쓴다. 빵집, 커피숍, 명품숍 이런 걸 한다더라. 해외에 나가서 글로벌 업체들과 경쟁하려는 패기가 없다."

 김 전 회장의 지적처럼 재벌가 3∼4세의 골목상권 침범은 한동안 소상공인들의 등골을 빼먹는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대기업 계열사간 거래에서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3∼4세들에게 '극히 편안한 사업 입지'를 챙겨주려 한 오너가의 개입 때문이었다.

 ◇ 외국물 너무 먹었나…3∼4세들의 나라는?

 KBS 시사기획 창은 탐사보도를 통해 재벌가 자제의 국적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적이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재벌가 구성원 921명 중 119명이 미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1∼2세는 5명뿐이고 114명이 3∼5세이다. 미성년자만 따지면 121명 중38명이 미국 출생이다. 미성년자의 미국 출생률은 31%에 달한다.

 그만큼 원정 출산이 재벌가에선 보편화했다는 의미이다. 원정 출산으로 물의를 빚은 사례도 많다.

 국적이 외국이다보니 병역 면제는 물론이고 세금을 내지 않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LG그룹 방계 범한핀토스 대주주인 구본호씨는 최근 조세심판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이 논란이 됐다. 미국 국적자로서 주식양도세 20억원을 내지 못하겠다며 소송을 낸 것인데, 증권가에서는 '검은 머리 외국인'의 국부 유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구씨는 LG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정회 창업고문의 손자다.

 ◇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다' 고립된 그들

 오너 3∼4세들은 대외활동이 활발한 경우도 있지만, 은둔형으로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황태자 대우에만 익숙할뿐 소통에는 서툴기 때문이다.

 부친이 회장으로 현직에 있는 경우에는 전면에 나설 수 없다는 한계도 있지만 지나치게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소통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재계 단체의 한 인사는 "재벌 3∼4세들이 이너서클에 갇혀 있다.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하는 일이라는 게 정부 욕하고 경제단체 욕하는 식이다. 그러다가 '누가 뭘 해서 돈 벌었다더라'로 화제를 옮기고 재테크에 열중하는 식이다"고 꼬집었다.

 이 인사는 "제조업보다는 주식투자, 특히 사모펀드, 선물투자에 손을 대기도 한다"면서 "이들이 공개적인 활동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들만의 관심사에서 벗어나양극화, 실업문제, 저출산 등 사회적 이슈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현대 한국 대기업들은 총수 유고 상태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와병 중이고 신격호 롯데 회장은 고령이다. 구본무 회장은 두문불출하고, SK 최태원 회장은 수감 중이다. 이래서야 산업정책이 제대로 펼쳐지겠느냐"며 "차세대 주자들인 이재용·정의선 부회장 등을 공개적인 활동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과도한 승계비용이 기업을 짓누른다

 재벌그룹은 오너 3∼4세를 위해 별도의 조직을 운영하면서 들의 대언론 보호, 대외활동 보호, 법률 세무 관련 승계작업을 전담하도록 한다.

 이런 비용을 다 합치면 기업에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홍보조직도 오너 보호에 지나치게 매몰돼 있다. 조현아 사태에서 보듯이 국토부조사에 임원 4∼5명이 따라붙었다. 오너 개인 문제에 임원들이 회사일을 내팽개치고오는 게 온당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 경영수업이라니?…자기회사에서만 받아야 하나

 재벌 3∼4세들의 경력관리에는 경영수업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경영수업이 오너 자제를 '온실속 화초'로 만드는 일종의 경영 병폐라고 지적한다.

 우리 기업 중에도 3∼4세를 다른 기업에서 단련시키는 사례도 있다.

 롯데 신동빈 회장이 일본 노무라증권에서 경력을 쌓았고, 얼마 전 승진한 현대중공업 대주주 정몽준 전 의원의 아들 기선씨도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컨설

턴트 일을 배웠다.

 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 박서원씨는 빅앤트라는 광고회사를 운영했다.

해외광고제 수상도 하고 실력을 쌓아 최근 오리콤 광고책임자로 영입됐다.

아버지에게 스카우트된 셈이다.

 그러나 대다수 3∼4세들은 주력 계열사 또는 내부거래 일감이 있는 계열사에서 손쉽게 경영수업을 받는다. 주변에서 만들어준 실적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는 식이다.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 한켠에는 우리 사회가 오너 3∼4세를 감싸안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교육자나 종교인 등 직업적으로 덕망을 갖췄다는 집단에서도 개별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실수를 하는 인사들이 있는데 그 하나를 보고서 그 집단 전체가 양식이 없다고 비판해선 곤란하다"며 "개인적 이슈를 확대 해석해서 오너 3∼4세를 집단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왕따' 하듯 전부를 몰아세워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배 부원장은 "이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3∼4세들도 타산지석으로 삼아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슴에 새길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오너경영 체제의 폐해라고 하지만 그간의 현실을 따지면 전문경영인 체제의 성과가 반드시 더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아니냐. 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어떤 체제가 우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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