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⑩초상화로 남은 고려인/고려건국을 예견한 도선국사

   
▲ 도선국사진영 :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의 초상화. 조선 후기작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됐으며 전남 유형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됐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 성보박물관 소장.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고려 태조의 탄생을 예언 - 불교는 물론 토속적 음양풍수론의 대가

오늘날 전하는 우리나라 옛 그림은 대분이 임진왜란 이후의 것들이기에 중세인 고려나 고대인 통일이전 그림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여 기의 존재가 확인된 고구려 고분 내 그려진 벽화는 7세기 초까지 근 300년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회화를 대표한다.

고려시대 것으론 고려후반에 국한되나 불화 및 말기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전친작인 ‘천산대렵도’로 지칭되는 ‘호렵도’와 ‘양 그림’ 잔결과 일본에 유출된 ‘삼청도’, 역시 공민왕의 그림으로 전하는 ‘염제신(1304~1382) 초상’(보물 1097호),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1319년 그린 ‘이제현(1287~1319) 초상’(국보 110호) 등과 국내·외 백수십 점에 이르는 아미타여래내영, 수월관음, 지강보살, 500나한 등 고려불화 등 대부분이 고려후기 제작된 것들이다.

비록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후기에 그려진 것이나 유명한 스님들로는 ‘도선국사’와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사대부 초상으론 ‘강민첨 초상’ ‘염제신 초상’의 등이 전하는데 이 중 ‘도선국사’부터 먼저 소개하려 한다. 무엇보다 도선국사는 고려 건국을 예견한 점에서 우리나라 회화사에 있어 일반회화 외에 불화 또한 어엿한 축을 이룬다.

감상화가 수묵 위주인데 대해 진채를 사용한 건축 내외를 꾸미는 서상장식화와 불화와 민화 등은 채색화로 주목되며 빼어난 수작들이 적지 않다. 인물화의 한 분야인 우리나라 초상은 보이는 것을 통해 학덕이나 수양정도 인 인품 등 등 중국의 과장이나 일본의 맥 빠진 필선과 구별되며, 보이지 않는 면까지 잘 드러낸 명품과 걸작들이 다수 전한다.

몇 안 되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인공이 보여주 듯 삼국시대가지 올라간다. 통일신라에선 왕의 초상이 사찰 내 벽화로 제작되어 봉안되었고 승상과 사대부상도 그려졌다. 비록 실물의 전래가 아닌 문헌을 통한 이해이나 고려시대엔 왕과 왕후의 초상은 사찰의 영전에 봉안했으며 공신초상이 그려졌고 여인상과 승상 등도 빈번히 제작되었다.

초상화는 주인공의 신분에 따라 임금의 초상인 어진, 국가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림 공신상, 70이상 수를 누른 원로대신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그린 기로도상, 평상복 차림의 일반사대부상, 드문 여인초상, 승상으로 크게 나뉜다. 이 들은 각기 우리 그림이 도달한 높은 위상과 격조를 웅변한다.

옥룡사의 징성혜등탑비(澄聖慧燈塔碑)의 비문에 의하면 영암 출신인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는 화엄사에서 15세에 출가한 후 두루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수행하다가 20세 되던 해 846년 곡성의 혜철(惠徹) 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850년에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운봉산에서 굴을 파고, 이어 태백산에선 움막을 친 수도를 거친 후 859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청암사를 창건하였다. 37세가 되던 863년 전라남도 광양시 옥룡사에 정착하여 898년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사후 효공왕은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린다.

제자들이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고려의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승려인 도선국사는 음양풍수설의 대가로도 이름을 전한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역사는 그로 인해 신라 말기까지 소급이 가능해진다. 이는 풍류도로 칭하는 우리 전래사상 내지 도교와의 상관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겠다. 스님은 새 국가의 창설자인 고려 태조의 탄생을 태어나기 2년 전 예언했다. 이에 태조를 비롯해 고려의 임금들은 도선국사를 극진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고려 숙종은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불교와 우리 문화-고대국가의 형성과 조형의지

우리나라 도처 명승지에는 불교사찰이 존재한다. 또한 문화재로 지칭되는 민족의 얼과 혼 그리고 미감이 담긴 조형미술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사찰건축, 조각의 주류를 점하는 무수한 불상, 석탑과 부도, 범종과 각종 의식 용구인 불기와 다기 등 금속과 도자 및 칠기 등 각종 공예와 불화가 증명하듯 대부분은 불교문화재들이기도 하다.

이뿐만이 아닌 우리의 의식과 사유체계 저변에는 불교가 깊이 점하고 있다. 인간됨을 주창하는 유교의 현실적 윤리와 구별되는, 철학적 사고를 비롯해 신앙에 담긴 윤회와 내세관에서 그러하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하듯 위대한 사상은 위대한 예술을 창출케 하는 진원지이며 배양토이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랄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척박한 사막에서 종교는 탄생한다. 이곳에 뿌려져 싹튼 식물은 온화하고 비옥한 곳으로 옮겨져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된다. 태어난 곳에서 벗어나야 제대로 발전한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 환골탈퇴 과정이 요구된다.

서구의 기독교와 동아시아의 불교미술 모두가 예외가 아니니 우리 인류의 역사가 이를 선명히 전한다. 이성과 감성은 상충되는 듯 보이나 이 둘은 보완과 상승의 기능을 한다. 참(眞)을 추구하는 학문과 아름다움(美)를 추구하는 예술은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이에 착함(善)을 더하여 종교는 지고지순의 거룩함(聖)을 이룬다. 우리들 인식과 이해의 90%는 눈을 통해 이루어지니 특히 시각예술인 미술의 기능은 실로 지대하다.

   
▲ 도갑사 : 1984년 2월29일 전남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으며 조선 전기 1456년(세조 2년) 수미(守眉)가 중건했다.

전통을 이야기 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오류의 하나나 이를 한 자 한 획도 고치면 안 되는 영구불변의 법칙으로 보는 점이다. 전통은 단순한 답습이나 재현이 아닌 가꾸고 만들어 가며 진화하며 고착 아닌 진행임을 환기해야 한다. 변질은 아니며 숙성이며 발효에 비교된다고나 할까. 진리에 국산과 외제가 있을 수 없으니 위대한 사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문학이건 조형미술이건 이른바 고전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인류에 기쁨과 행복을 부여한다. 미래의 새로움을 창출할 콘텐츠 내지 에너지원의 보고(寶庫)로 그 기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린다.

4세기 우리 강역에 도달한 불교는 인간만이 아닌 무생물과 유생물을 모두가 같다는 평등과 변하고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는 무상(無常)을 두 축으로 한다. 나아가 개인의 안신입명(安身立命)의 차원을 넘어 사회, 역사적 기능으로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지대한 역할을 한다. 1970년대 후반 일본 나라에 위치한 야마토문화관 특별전을 통해 화려하고 섬세하고 장엄한 고려시대 불화의 진면이 세상에 드러났다. 의식과 예배, 사찰의 장엄을 위해 제작된 숱한 그림들은 비록 일반 감상화는 구별되나 고려청자로 대변되는 도자공예에 뒤지지 않는 고품격, 높은 수준의 완성미로 매우 감동적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문 고려와 조선왕조가 500년 넘게 의연하게 견지된 것은 불교와 성리학의 힘이며 이들이 주체이념인 사유체계로 실 생활화에 영향을 준 까닭이다. 공자와 붓다의 가르침은 태어난 곳에선 시들고 우리 민족에 의해 세계적인 사상이자 신앙체계로 완성되어 오늘에 이른다.



하늘별의 잉태인가 산천신의 화신인가

참외 물 위에 뜨고 비둘기 품었으니 숙세의 덕 고매하네

주역과 비결로 스님을 일컬으니 귀신이 내란 감여의 눈

조예 더욱 깊어져 물초에 노니니

병든 몸에 침놓고 뜸뜨듯

삼한을 통일하시니 그 공이 가볍지 않네

특히 선암사 중창하여 종문을 오래 편안케 하셨으니

사당을 세우고 그 모습 그려 천추토록 봄과 가을로 제사 받드네

임진년 2우러 전당의 혜근이 고개 숙여 절하고 공경히 찬하다




#차분한 스님의 모습-제찬과 더불어

부처의 가르침은 불상 자체도 만들지 말라 했지만 스승에 대한 존숭은 무상의 틀을 거부하여 국가별 민족별로 무수한 불상을 낳는다. 이어 나한상이 말해주듯 부처의 제자 및 승상도 그렸다. 승상은 일찍부터 그려져 먼저 발전했으며 특히 통일신라 말 선종(禪宗)의 개화는 승상을 활발하게 제작하는 데 큰 요인이 되었다. 국사전이나 조사당에 이들 승상을 안치했다.

선암사는 이곳에 안치된 ‘도선국사진영’진영에는 제찬이 있어 주인공인 도선국사의 성품과 행적에 대해 그리고 제작시기마저 알려준다. 아마도 그 이전에 전해온 스님 상을 1805년 도일(道日)이 중수한 화기가 화면 내 적혀있다. 이 진영은 원래 1256년(세조 2년)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守眉王師)의 발원에 의하여 제작된 것이라 사찰에 전해오나 화풍상의 특징으론 제찬이 있는 1805년 경 제작된 것이다. 과연 원래 초상을 얼마나 반영했는지는 살피기 어렵다 하겠다.

조선시대 일반초상과 마찬가지로 왼쪽 안면의 비중이 큰 7분면이다. 왼손에 주장자를 지닌 다리 길고 등이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일반화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크게 대비되나 녹색의 가사에 붉은 장삼을 입고 앞을 향해 조용히 앉아 있는 자세로 정형화 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인 스님 초상이 그러하듯 호분을 많이 입혀 사부상의 얼굴과 달리 보다 희다. 오른쪽 어깨 위에는 가사 자락을 묶은 금구 장식이 묘사되었으며 두 발은 가지런히 모아 의자의 발걸이에 올려놓았다. 제찬을 쓴 혜근(惠勤)은 동처에는 ‘대각국사진영’도 안치되어 있다. 같은 스님이 찬한 것으로 엇비슷한 크기이되 약간 작은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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