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경기천년, 고려시대의 경기문화
⑪경기도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와 인물(1)

   
 

홍순석 강남대교수

이천 서씨는 경기도 이천을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한국의 성씨이다. 이천 서씨는 고려 건국에 협력해 서필(徐弼)·서희(徐熙)·서눌(徐訥)·서정(徐靖)·서균(徐均)·서공(徐恭) 6대가 연이어 재상에 오르는 명문 귀족가문이 되었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에 제향되었다. 고려 현종비 원목왕후는 바로 이천 서씨이다. 이처럼 이천 서씨는 고려시대에는 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와 더불어 4대 명문가문으로 꼽혔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18년(935년)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목(徐穆)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됐다. 바로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따온 지명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천현에 세거한 성씨를 보면, 서(徐), 신(申), 안(安), 한(韓), 장(張), 왕(王), 홍(洪), 황(黃)의 여덟 성씨가 살았는데, 다른 성씨는 전해 내려오는 바가 없으며, 오직 서씨만이 뒤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이천서씨의 발상지인 이천시 부발면의 효양산

서신일은 이천서씨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서씨의 시조로도 추앙되고 있다. 그의 행적은 정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이천서씨 족보에 의하면, 서신일은 신라 말기에 벼슬이 아간(阿干)에 이르렀지만 스스로 벼슬을 내려놨다. 아우 서신통(徐神通)과 함께 지금의 경기도 이천 효양산 아래 집을 짓고 정착했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효양거사라 칭하고 후학들의 교육에 힘쓰니, 제자들이 몰려와 집 안팎으로 가득 찼다. 서신일은 74세에 부인과 사별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이에 서신총의 아들 서목을 보내어 입계하려 하였으나, 서신일이 천륜을 빼앗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훗날 다시 부인을 맞이하여 80세에 서필을 얻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화가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실려 있다.

‘국초에 서신일이 교외에 살고 있었는데, 화살이 꽂힌 사슴 한 마리가 그의 앞으로 뛰어와 쓰러졌다. 서신일은 화살을 뽑고서 숨겼다. 곧이어 사냥꾼이 나타나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 “사슴은 나의 자식인데 그대의 힘을 입어 죽음을 면했소. 나는 그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재상에 올라 영달을 누리도록 도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신일이 나이 80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서필이다. 서필이 서희를 낳고, 서희가 서눌을 낳았는데, 과연 계속해서 태사 내사령이 되었고, 묘정에 위패가 모셔졌다.’

이같은 일화는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수록되어 있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내의령에 올랐다. 내의령은 내의성에서 가장 높은 종1품의 수상격에 해당한다. 서필의 아들이 바로 서희이다. 서희의 아들 서눌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꿈에 나타난 신인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서신일의 묘소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번지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묘소와 관련 사슴과 관련된 설화가 하나 더 있다. 서신일이 천수를 다하니, 사슴이 나타나 상주(喪主)의 옷자락을 끌었다. 이상히 여긴 상주가 사슴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어느 양지바른 산기슭에 멈추어 서서 발굽으로 자꾸만 땅을 파헤쳤다. 이것은 필시 산신령의 계시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 장례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은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서신일의 부인은 합천홍씨로 홍찬(洪贊)의 딸이다. 아들인 서필은 평양황씨(平壤黃氏)과 결혼하여 서염(徐廉)·서희(徐熙)·서영(徐英)을 낳았다. 서희는 4형제를 두었는데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서유위(徐惟偉)·서주행(徐周行)이다. 서신일의 동생 서신통은 아들 서목을 두었다.

#‘이섭대천(利涉大川)’ 효사에서 따온 이천의 지명

이천서씨가 고려시대의 4대 성씨로 부각하였던 것은 전적으로 서목의 공로에 기인한다. 그는 부친의 뜻을 따라 신라 말기에 벼슬에의 뜻을 접고 남천(南川·현재의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복하(福河)를 건너고자 할 때 큰 비가 내렸다. 강물이 불어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없어서 태조는 서목을 찾아가 강을 건널 방법을 물었다. 이에 서목이 군대를 이끌고 앞장서서 강을 이롭게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이 때문에 왕건은 남천을 이천(利川)으로 고치고, 서목을 이천백(利川伯)으로 봉했다. 지금의 이천이란 지명은 왕건이 강을 건너는데 도움을 준 사실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즉,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큰 강을 건너니 이롭다)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이다.

   
 

#거란의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철수시킨 서희(徐熙)

서희는 이천 효양산 기슭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조부 서신일, 부친 서필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서희는 부친에 이어 재상의 직위에 올랐고, 다시 아들 서눌· 서유걸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를 지냈다.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서희 자신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년) 3월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쳤다. 983년(성종 2년)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태보·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서희는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 수 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희의 공적 가운데 가장 기념비적인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을 격파한 뒤, “거란이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영토의 경계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 이지백(李知白)이 동조하자 성종도 허락하였다. 이 때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해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서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으로부터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받자 ‘뜰에서의 배례는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섰다.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이 후자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로 논한다면 거란의 동경(東京)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들어와 포악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하고 설득하였다. 이와 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그 결과 994년(성종 13년)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 6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서희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다. 그리고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그가 만년에 병환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해 어의 한 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효양산전설문화축제’로 비상하는 이천 서씨의 발상지

효양산은 삼국시대 토성지와 선사유적지, 서씨 시조 묘 등 유서 깊은 유적들이 자리하고 금송아지 이야기,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와 같은 전설들이 깃들어 있는 이천의 명산이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는 이 같은 효양산의 전설과 사적을 소재로 한 문화행사로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고, 지역민의 화합을 위해 지역주민들 스스로 추진위를 만들어 10년째 개최해오고 있다.

이천 시내 중앙과 설봉산 공원에는 서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천 세무서 정원에는 서희의 일대기를 스토리텔링화한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부발읍 산촌면 효양산 기슭에는 이천 서씨의 시조인 서신일의 묘역이 있어서 10월에 제향하는 시제 때는 800여명의 후손들이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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