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는 미군 위안부

“정부는 기지촌내 성매매 방치 및 묵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 및 정당화 했다.”

지난 2월 8일 기지촌 미군위안부 국가배상청구소송 항소심에서 내려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 중 일부다.

통칭 ‘양공주’로 일컬어졌던 기지촌 미군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법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이들에 대한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 때는 ‘외화벌이 1등 공신’으로 받들여지다가 이제는 최소한의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은채 쪽방에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안보 미명하에 국가에 의해 희생된 여성들=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1970년대 본격화됐다.

당시 미국이 닉슨독트린에 따라 2만 명의 주한미군을 감축하고, 미국내 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한국정부는 ‘기지촌 정화위원회’를 설치한다.

혹시모를 기지촌 여성에 의한 미군의 성병 감염 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성병관리를 의무적으로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점검·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기검진에서 이상이 발견된 여성들은 ‘몽키하우스’로 불렸던 수용소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국가배상청구소송 7차 변론을 맡았던 문정주 서울대 교수는 “당시 보건소가 비인격적인 성병검사로 기지촌 여성들을 모멸했고, 경찰은 법을 위반해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유린했다”면서 “시민사회역시 피해여성의 인권유린을 묵인했다”고 언급했다.

기지촌 할머니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공무원들은 성매매할 때 미군을 대하는 태도를 세부적으로 교육했다.

어떤 경찰 관계자는 “미군을 불쾌하게 하면 이적행위”라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기지촌 인근 주민들은 이들을 ‘양색시’ 또는 ‘양공주’라고 힐난했다.



◇“이들의 인격을 국가적 목적 달성 수단으로 삼았다”= 이처럼 사회에서 격리된 채 긴 세월을 살아온 기지촌 할머니들은 국가를 상대로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지난 2014년 기지촌여성인권연대를 주축으로 국가배상소송공동변호인단과 시민단체가 연대해 기지촌 할머니 122명이 ‘한국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다.

소송 제기 후 11차까지 이어진 변론 끝에 서울중앙지방법원은 1심에서 근거 없는 성병 감염자 강제수용은 ‘위법행위’로 판단했다.

또 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해 1997년 8월 이전에 격리 수용된 미군위안부 피해자 57명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어진 항소심에서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더욱 확대했다.

올해 2월 8일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정부는 기지촌내 성매매 방치 및 묵인을 넘어 적극적으로 조장 및 정당화 했다”며 “청구인들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나아가 성으로 표상되는 이들의 인격 자체를 국가적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며 원고 전원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을 판결했다.



◇변하지 않는 사회와 제도권의 시선= 하지만 법원의 두 차례에 걸친 판결에도 기지촌 할머니들의 삶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들에게 성매매를 조장했던 지자체는 상위법 미비를 이유로 지원 조례를 만들지 못하고 있고, 사회의 시선 또한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평택시에서는 지난 8월 기지촌 할머니들 지원 조례 제정을 위한 시민토론회가 열렸지만, 미군기지 인근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K-6(캠프험프리스)가 위치한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일대 상인들이 토론회장에 난입해 “반미감정만 조장하는 것”이라며 거칠게 항의하면서다.

상인들은 “미군 위안부라는 말이 공용화되면 평택에 거주하는 미군들과 갈등이 생긴다”, “자발적으로 매춘을 선택한 여성들이 국가가 미군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단지 빈곤 독거노인일뿐 미군 위안부는 허울 좋은 명칭이다”는 등 정제되지 않은 발언으로 조례 제정 시도조차 반대했다.

지자체 또한 조례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까지 지난 국감에서 상위법 미비 등의 이유로 조례 제정에 난색을 표하면서다.

경기도내에는 평택과 파주, 동두천, 의정부 등에 250명가량의 기지촌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마저도 공식 통계는 아니다.

한 때는 민간외교관으로까지 불렸던 이들의 현재를 고민하는 시선은 극히 일부에 그치는 실정이다.

기지촌 할머니들을 돕고 있는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 우순덕 원장은 “정부와 지자체에 도움을 요청해도 법 조항이 없으니 특별히 도와드릴 수 없다는 응답만을 들어야 했다”면서 “국가가 포주가 되어 성매매를 알선했었다. 국가는 이제라도 근본적인 책임과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황영민기자/hym@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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