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한 해였다.

마무리의 시간은 겨울 안갯속에 부서져 아쉬움으로 희미해지고, 다가오는 시간은 햇무리의 번짐처럼 설렘을 주지만 ‘잘할 수 있을까?’라는 갸우뚱에 주저스럽다.

그렇지만 세상살이 그리 만만치 않더라도 크게 심호흡 한 번에 새로운 출발을 채비한다.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결국 ‘우리’였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희망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저와 낙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잘못된 것은 없다. 다 잘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뿐이다.’

삶이 팍팍하다 느껴질 때, 대단히(?) 낙관적 가치관의 소유자인 나는 이 말을 되뇐다.

어찌 보면 살아간다는 것이 만족과 성공의 연속일 수는 없다.

반대로 실패와 낙담의 반복일 수도 없다.

그럭저럭 그날이 그날이고, 지지부진한 날들이 대부분이다.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교차할지 몰라도 내일을 위한 전조(前兆), 예비라 여기면 남 탓이나 자책, 일희일비(一喜一悲)는 의미와 도움이 되지 못한다.

2023년과 2024년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그간의 수고에 감사하고 새해의 도전을 격려하고 있다.

새해는, 내일은, 미래는 우리가 간구하는 희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태양은 8분 19초 전 지구를 향해 출발한 빛이며 새삼 어제의 태양과 다를 바 없듯, 내일이란 하룻밤 자고 난 오늘일 뿐이다.

오늘 준비되지 않았다면 내일 얻을 것도 없다.

내일 희망의 성취를 원한다면 오늘 희망을 뿌려야 한다.

버거운 한 해였더라도 ‘내일을 위한 준비였다’ 생각하면 뭐 그리 마음 끓일 일도 아닐 듯싶다. 이 사람을 떠올리면서 2024년 새로운 출발을 망설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가끔 당신이 낙담하게 될 때면 이 분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초등학교를 중퇴했다.

시골에서 구멍가게를 경영했다. 파산했다. 빚을 갚는 데 15년이 걸렸다.

결혼을 했다. 불행한 결혼이었다.

하원에 입후보했다. 2회 낙선. 상원에 입후보했다. 2회 낙선.

역사에 남을 연설을 했다. 그렇지만 청중들은 무관심했다.

신문에서는 매일 얻어맞고, 반 이상의 국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해 보세요.

세계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A. 링컨이라고만 자기를 간단히 밝히는

이 재주 없고, 서투르며, 무뚝뚝한 사람에게 감동되었는가를."

이 글의 헤드라인은 ‘이것으로 당신의 기분은 좋아질 것입니다’이다.

오래전 미국 기업의 PR 광고 중 하나로, 이 광고 밑에는 자그마한 글씨로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느냐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일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점(點)이 모여 선(線)이 된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오늘의 ‘우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은 없다.

내일 즐거운 외침을 원한다면, 만점 답안을 원한다면, 당선을 원한다면, 연인의 사랑을 원한다면 오늘 그 씨앗을 뿌려야 한다.

내가 공정하지 않으면 공정한 우리나라가 될 수 없다.

내가 예의 바르지 않으면 품격의 우리나라가 될 수 없다.

내가 정직하지 않으면 정직한 우리나라가 될 수 없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한 우리나라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결국 ‘우리’다.

숨 가쁘게 달려온 오늘, 고단한 날갯짓을 잠시 접고 곁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어깨를 기대어 보자. 흔쾌히 어깨를 내어 준 그 친구도 사실 힘든 시간을 보냈겠지만, 그들은 ‘넌 할 수 있어!’, ‘넌 잘 될 거야!’라며 따듯한 용기와 위안을 줄 것이다.

정상환 한국홍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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