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주역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
학원 설립 초창기 자리 잡는 데 큰 역할
아들 알칸베크만씨 부친 사진·말씀 증언
노래 가르치고 옷 사주고 음식 나누는 등
한국 아이들 위해 헌신한 父 행적 큰 유산

한국전쟁 시기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가정에서 돌보기 어려운 피난아동들의 쉴 곳이 돼준 ‘수원 앙카라학원’

앙카라학원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튀르키예 군인들과 한국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이 있었다.

아무런 연고 없는 한국의 아이들을 위해 손을 걷어붙인 이들 가운데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1908년~1967년) 상사는 초창기 앙카라학원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힘썼던 숨은 주역이다.

딘츠튀르크 상사는 1951년 9월, 터키 제 1여단 2차 호송대로 복무하기 위해 튀르키예 이스켄데룬 항구에서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딘츠튀르크 상사 사진=강경묵기자
딘츠튀르크 상사 사진=강경묵기자

그는 한국에서 약 1년간 복무하고 터키로 귀국했는데 그가 한국에 머무른 1년의 기간은 앙카라학원 설립(1951년 7월 7월) 이후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다.

그와 관련된 기억과 기록은 이제 그의 아들 알칸 베크만(79)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세월은 무심해 아들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됐다.

기억은 흐릿해졌지만 한국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과 몇 가지 기억만은 또렷하다.

지난 8월 14일 이스탄불에서 만난 그는 양손 가득 아버지에 관련된 기록과 사진을 들고 취재진을 맞았다.

가져온 기록의 일부는 설명이 가능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시 전해 받은 사진일 뿐 자세한 기억과 설명은 하지 못했다. 다만 아버지의 마음 헤아려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띈 것은 왜 인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한국인들의 사진이 있었고, 오랜세월 간직해온 그 사진들을 통해 한국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취재진에게 사진을 설명하고있는 알칸 베크만(참전용사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의 아들) 사진= 안형철기자
취재진에게 사진을 설명하고있는 알칸 베크만(참전용사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의 아들) 사진= 안형철기자

알칸 베크만씨가 취재진에게 건넨 첫 마디는 "아버지 돌아왔을 때는 나는 9살이었다"며 "아버지는 ‘한국에서 나와 같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되어주었다’"며 아버지의 말을 돌이켰다.

아들 알칸 베크만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행적에 따르면 딘츠튀르크 상사는 여단 본부 소속 급양 또는 취사 담당 하사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후방이었지만 딘츠튀르크 상사가 한국에 도착해서 맞닥뜨린 광경은 참혹했다. 군부대에서 나온 음식 쓰레기를 버려둔 곳에는 노인과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음식 쓰레기를 뒤져가며 먹을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알칸 베크만은 "아버지는 그들을 모습에서 튀르키에 에 있는 나와 내 동생이 떠올라 음식과 생필품 등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며 "요리사?(취사병으로 추정)들에게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챙겨주자고 했고 남은 부식 등을 챙겨 모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려고 애썼다"며 아버지의 기억을 전했다.

참전용사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베크만씨 가 소장 중인 그의 아버지 사진. 사진은 앙카라학원 원아의 체육행사 모습으로 추정. 사진= 안형철기자
참전용사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의 아들 알칸베크만씨 가 소장 중인 그의 아버지 사진. 사진은 앙카라학원 원아의 체육행사 모습으로 추정. 사진= 안형철기자

이어 "막사 안 아이들의 자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 줄 수 있도록 높은 사람(여단장으로 추정)에게 건의했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노인과 아이들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가족관계를 확인했으며 아이들 중 일부는 부모가 없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딘츠튀르크 상사의 뜻에 다른 군인들도 동참했고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한국정부에 교사 2명을 요청했다. 또 아이들이 텐트 안에서만 지낼 수 없으니 창고에 지낼 공간을 만들었다.

알칸 베크만씨가 전한 아버지 딘츠튀르크 상사의 이 같은 행적은 앙카라학원 설립 일련의 과정과 같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과는 다소 다르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바하틴 에리사야 특무상사가 타신 야지즈 여단장에게 처음 앙카라학원 설립을 상신하고 딘츠튀르크 상사가 한국에 도착하기 전인 1951년 7월 7일 설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앙카라학원 원아들과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 사진= 안형철기자
앙카라학원 원아들과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 사진= 안형철기자

다만 앙카라학원 초창기 즈음 터키군에서는 한국정부에 교사를 요청한 바 있고, 또 설립 당시에는 앙카라학원이 아닌 고아원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딘츠튀르크 상사를 학교로써 앙카라학원을 추진한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알칸 베크만씨는 "아버지는 앙카라초등학교를 설립했다고 말했다"며 "창고를 활용해 학교를 만들었고 튀르키예로 귀국하며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경영했던 학교를 떠나는 것"이었다며 앙카라학원에 대한 아버지의 남다른 애정을 증언했다.

또 ‘부모가 없는 아이들 옷도 새로 예쁘게 사주고 우리 자식처럼 돌봤다(아마도 튀르키예 군인들이 일본 휴가에서 사온 교복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 ‘우울해 하는 아이들에게 튀르키예의 노래를 가르쳐줬다’ 등 단편적인 아버지 기억도빠짐없이 전했다.

앙카라학원 원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딘츠뒤르크 상사(가운데 뒷편)와 그의 동료 사진= 강경묵기자
앙카라학원 원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딘츠뒤르크 상사(가운데 뒷편)와 그의 동료 사진= 강경묵기자

딘츠튀르크 상사는 귀국 이후에도 학교가 계속해서 더 넓은 기회를 가지고 튀르키예군이 손을 떼지 않고 지속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안도하고 기뻐했다고 한다.(1954년 10월 29일 앙카라학원의 확장공사)

알칸 베크만씨는 "아버지가 남긴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은 그의 행적과 기억"이라며 "나의 아이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늘 자랑스럽게 말해줬다"고 말했다.

그 영향이었을까. 할아버지에게 한국의 이야기를 무수히 들었던 두 손녀 에즈기라(27), 베스테(24)씨도 수많은 나라 가운데 한국을 방문했으며 증조할아버지의 행적을 좇아 앙카라공원(수원시 소재)에도 다녀갔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4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4대까지 내려온 동력은 딘츠튀르크 상사의 진심과 그에 따른 감동이 아닐까. 생전 딘츠튀르크 상사가 알칸 베크만 씨에게 들려준 말에서 그 진심을 깊게 느낄 수 있다.

"너희들을 생각하면서 똑같은 자식으로 여기며 그 아이들에게 아빠가 되어주었단다. 그곳에 있는 어떤 사람들도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안형철기자

참혹한 전쟁 속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영웅이 비단 하산 후세인 딘츠튀르크 상사 뿐이었을까. 부족하지만 딘츠튀르크 상사의 공적을 기리며 이름이 알려지지 못한 이들의 헌신에 다시금 감사를 표한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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