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 장벽으로 '언어' 최다 응답
다국어 공약·정당 정보 제공 미흡
영주권자 '사회 일부 아니다' 인식
귀화인보다 투표 참여율 떨어져
선거법상 외국어 공보물 규정 없어
일부 지선후보만 외국어 홍보물 제작
시흥·안산 외국어 안내문 게시도
영주권자에 투표권 적극 안내 필요

 

#김포시에 사는 이주민 정순금(36) 씨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기 위해 동네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 대기 줄이 긴 민원창구를 피해 무인발급기에 들어선 정 씨는 외국어 안내 버튼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길 잃은 손가락이 화면을 맴돌았다. 결국 가족관계 증명서를 뽑지 못한 채 민원창구로 발길을 옮겼다.

#같은 날, 또 다른 이주민 징징(50) 씨는 동네 오일장을 찾았다. 남편과 함께 가끔 찾는 곳이지만 한국어가 서툴러 갈 때마다 통역을 부탁하곤 한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혼자 방문했다. 햇연근을 본 징징 씨는 신기한 듯 물었다. "이거 뭐예요? 어떻게 (요리)해요?" 상점 주인은 "간장에 졸여 먹으면 맛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징징 씨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투표권이 있는 외국인 주민들은 왜 투표장으로 향하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언어였다. 우리말에 익숙지 않다 보니 선거 안내자료와 후보자 정보를 보내줘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6·1 지방선거 당시 투표소 전경. 김도윤 기자
지난 6·1 지방선거 당시 투표소 전경. 김도윤 기자

특히 이주 외국인 참정권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배려가 부족해 자신이 투표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한국 생활에 큰 장벽이 된 언어… 투표 과정에서도 한국어 서툴러 어려움

언어는 한국 생활을 하는 외국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법무부가 2019년 실시한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에 따르면 영주권자들은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언어를 꼽았다. 언어가 문제라고 답한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50.5%로 문화(40.8%), 민족(38.2%), 인종(35.2%), 피부색(29.2%), 종교(14.5%)보다 월등히 높았다.

2006년 한국에 와 2018년 영주권을 획득한 중국 국적의 양수연 씨는 “한국어가 서툴다 보니 후보자 정보를 제대로 알기 힘들었다”며 “결국 한국말을 잘 아는 분에게 도움을 받아 투표했다”고 말했다.

결혼 이주로 한국에 귀화한 베트남 출신 김나영 씨 역시 “지난 3월 대통령 선거 때 한국 정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언어도 서툴러 후보를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언어 때문에 투표를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중국동포 출신 영주권자 정순금 씨는 “한글을 잘 읽지 못하다 보니 후보자 정보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며 “선거 공보물을 보낸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고 전했다.

중국에서 온 영주권자 정순금 씨가 한국어가 서툴러 무인민원 발급기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 김도윤 기자
중국에서 온 영주권자 정순금 씨가 한국어가 서툴러 무인민원 발급기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모습. 김도윤 기자

◇정치 현안 이해 부족도 투표율 하락에 영향 미쳐

언어 문제로 인한 어려움은 정치 현안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어졌다.

2018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베트남, 필리핀, 중국 등 7개국 출신 이주민 43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주민의 권리에 기반한 사회통합 방안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방선거에서 투표하지 않은 이유를 물은 질문에 ‘한국 정당이나 후보자에 대해 잘 몰라서’라고 답한 사람이 56.3%(복수응답)으로 가장 높았다. ‘한국 정치나 선거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답변한 사람도 31.3%나 됐다.

2007년부터 한국에 거주 중인 키르기스스탄 출신 영주권자 홍안나 씨는 “한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정치적 언어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며 “익숙한 모국어 매체를 통해 한국 소식을 접하기도 하지만, 뉴스를 자세히 전달해주지 않는 만큼 정보를 습득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2012년 중국에서 귀화한 정춘이 씨 역시 “대부분의 이주 외국인은 공약집이나 뉴스 등을 보고 정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어느 정치인, 정당을 선택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뭐하러 투표를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토로했다.

돈을 벌기 위해 한국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투표보다 생계문제가 먼저였다. 1998년 한국에 온 중국동포 출신 영주권자 강선화 씨는 “사는데 바빠서 선거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며 “중국에서도 투표해본 적이 없어 한국에서도 자연히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외국인=이방인’… 귀화인과 영주권자 인식차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영주권자들이 참정권 행사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귀화와 영주권의 차이에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으로 국적을 바꾼 사람과 자기 국적을 유지하며 영주권을 얻은 사람의 인식차가 클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2016년 귀화한 러시아 출신 방송인 일리야 벨라코프 씨는 “귀화인들은 다양한 사회 현안에 관심을 가지려 하지만, 국적을 바꾸지 않은 영주권자들은 ‘나는 이 사회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강해 참정권 행사에 대한 의지가 적을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밝혔다.

2018년 튀르키예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기자 출신 방송인 알파고 시나씨 씨도 같은 생각을 전했다. 그는 “영주권자들은 언젠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이라며 “참정권은 죽을 때까지 이 나라에서 살 사람들이 행사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주권자와 귀화허가자의 선거 참여율. 
영주권자와 귀화허가자의 선거 참여율. 

실제로 영주권자들과 귀화인들의 투표율 차이는 컸다. ‘2019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에 따르면 투표에 참여한 영주권자는 23.1%에 머문 반면, 귀화허가자들의 투표율은 두 배 이상인 54.1%로 큰 차이가 났다.

윤인진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이 같은 인식 차이는 이주 외국인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사회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윤 교수는 “2년 전 외국인 주민과 결혼이민자에 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는데 소속감 점수가 평균보다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내국인들이 이주 외국인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이방인으로만 대하려는 태도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주 외국인을 위한 선거홍보 여전히 부족… “몰라서 투표 못 하는 사람 많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올해 대선부터 다문화 유권자를 위해 한국어와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등 4개 언어로 만든 안내 자료를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선관위는 선거 공보물 발송 시 이주민 세대에 별도로 외국어 안내문을 보냈고 다국어로 된 팸플릿을 제작해 주요 관공서, 민원실 등에 비치하는 등 홍보를 진행했다. 또 선거연수원에서는 이주 외국인 투표가 시작된 2006년부터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선거제도와 참여방법 등을 알려주는 연수를 실시하고 있다.

이주 외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의 경우 지자체 스스로 홍보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시흥시는 외국인 투표권 관련 내용을 담은 현수막과 SNS 게시물을 올렸다.

안산시는 단원구 선거관리위원회의 요청을 받아 외국인 주민지원본부 건물에 투표 홍보 현수막과 포토존을 설치하고 주요 외국어로 안내문을 게시했다.

안산시청 관계자는 “이주 외국인들이 인터넷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만큼 이번 오프라인 홍보가 효과를 냈을 것으로 평가한다”며 “다음 지방선거에서도 오프라인 홍보를 지속하고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홍보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일부지만 외국어로 선거유세나 현수막을 제작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주 외국인이 가장 많은 안산시의 경우 지난 2018년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추연호 시의원 후보가 중국어로 된 홍보물을 만들었고,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귀화인 출신 황은화 후보가 중국어로 선거유세를 펼쳤다.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징징 씨가 시장에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 김도윤 기자
필리핀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징징 씨가 시장에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 김도윤 기자

하지만 후보자와 정당 정책을 소개하는 선거 공보물은 여전히 한국어로만 제작되고 있다. 후보자 측이 직접 제작하는 데다 공직선거법상 외국어 공보물 제작과 관련된 규정이 없어서다.

또 국내법상 외국인은 투표권이 있는 영주권자를 제외하면 모든 정치참여가 제한된다. 공직선거법 제16조에 따르면 외국인은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자격인 피선거권이 없다. 또 정당법 제22조는 외국인의 당원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선거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공직선거법 60조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경우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다만, 영주권을 얻어 지방선거 투표권을 받은 외국인의 경우 예외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아제르바이잔 출신으로 2021년 귀화한 니하트 싱크 씨는 “영주 비자를 취득해도 참정권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다 보니 투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많다”며 “정보가 공유돼야 권리를 행사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날 텐데 별다른 설명 없이 ‘당신은 비자를 받았다’는 사실만 전해주면 어떻게 투표를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선거홍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약이나 정책마저 부실하다보니 더더욱 투표에 나서지 않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러시아에서 귀화한 방송인 일리야 벨라코프 씨는 “이주 외국인 수가 전체 인구의 4%를 차지하지만, 한국의 정치 환경은 외국인에게 배타적인 것 같다”며 “특히 외국인 주민이나 귀화인을 위한 정책이나 공약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이어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경기도, 외국인 주민이 밀집된 안산시에서도 관련 공약이나 정책을 확인하기 어렵다”며 “관심을 받지 못하는데 굳이 정치 현안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인권증진보도팀(이세용·이한빛·김도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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